기자명 윤주진기자
  • 입력 2016.02.03 14:16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큰 기업과 작은 기업 간에 벌어지는 가장 큰 대표적인 갈등이 바로 하도급 거래와 관련이 있는 일이다. 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원사업자가 ‘을’인 수급사업자에게 부당한 횡포를 저지르는 경우를 말한다. 일방적으로 공급 단가를 깎도록 한다든지, 제품에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품 조치를 하는 등의 ‘갑의 횡포’는 이미 언론을 통해 자주 드러난 사회적 문제다. 

이 같은 하도급 거래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갑의 횡포를 두둔하는 이는 없다.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기업 혹은 기업인들에 대한 처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법체계 역시 이 같은 점을 반영해 계속해서 갑의 횡포를 방지하는 방향으로 고쳐졌다. 

하지만 그 처벌의 기준이 모호하고, 자칫 우리 기업과 경제 생태계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대상인 ‘부당한 단가 인하’에서 ‘부당’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애초부터 정당한 단가 인하 요구조차 원수급자가 망설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가격부담으로 옮겨지거나, 외국 경쟁 기업의 매출 증가로 이어진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한국의 하도급 규제가 이와 같은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있다며 하도급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문제

지난 2011년 제18대 국회에서는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기술을 탈취하거나 유용하는 행위에 대해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다. 흔히 말하는 ‘기술 빼가기’ 악습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도입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2013년 들어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2012년 총·대선 정국에서 경제민주화 바람이 정치판을 휩쓸고 지나가자 국회는 서둘러 하도급법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19대 국회는 기술의 편취·유용은 물론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한 반품 행위, 하도급 대금에 대한 부당한 단가 인하에 대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이 같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광범위한 적용이 외국의 입법례와 애초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자체의 도입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전삼현 숭실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한 칼럼에서 “징벌배상제는 악의적인 위법행위에 대하여서만 적용해야 하는데, (하도급법)개정안은 여전히 경과실의 경우에도 적용하도록 하고 있어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와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 입법제도에 대한 저평가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도급법이 명시한 ‘부당성’에 대한 입증 책임이 원사업자에게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우리 헌법체계가 규정하고 있는 입증 책임 원칙과도 맞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한 미국에서도 수급사업자가 직접 원사업자의 악의를 입증해야만 징벌 배상이 성립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낸 보고서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불법 행위가 은밀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피해를 입혀야 하며 ▲일반적인 불법 행위보다 가중된 위법성이 나타나야 함에도 하도급법의 부당 거래는 이 같은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글로벌 경쟁 시대에 걸맞은 하도급법 필요

치열한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품 등의 공급 단가를 줄이려고 하는 행위는 기업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만큼, 하청업체에 대한 납품 단가 인하 요구는 경제 생태계에서 아주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행 하도급법상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가는 자칫 부당한 갑의 횡포로 규정될 수 있어 원사업자에게는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수급사업자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대기업 생산 현장 관계자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있으면 당연히 하청업체 변경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면서 “특히 국내기업보다 해외 기업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국내 중소기업 보호를 목적으로 도입한 법이, 오히려 중소기업의 일거리를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해외기업과의 가격 경쟁 역시 부담스럽다. 글로벌 개방경제 시대에서는 국내 시장이라고 해서 더 이상 국내기업이 특혜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해외기업이 더 낮은 가격의 제품을 들고 오면 국내기업은 시장 자체를 내줄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하도급법의 규제를 받는 국내기업이 하도급법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 해외기업에 비해 가격경쟁에서 열세에 놓이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경쟁에서 밀려 국내기업이 시장을 뺏긴다면 사업 자체가 줄어드는 하청업체에게도 악재일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신석훈 연구위원은 “이처럼 강력한 하도급법을 가진 국가는 한국 밖에 없다”면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하도급법이 오히려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기업이 하도급법 때문에 새 하도급 계약을 맺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차라리 자회사를 만들어서 내부거래를 선호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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