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05 11:08
중국 쓰촨의 박물관에 있는 토용. 북을 치며 신나게 이야기를 펼치는 동작을 표현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한(漢)대 작품이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백 살까지 살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렇게도 건강장수를 축복이라고 노래했으면서도 정작 백 살을 산다고 생각하니 이건 절대 아니라는 맘을 떨치기 힘들다.

두려움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확실하지 않기에 불안하다. 마시면 백세를 산다는 술이 있다. 늙은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젊은이의 그림이 나오는 선전인데, 주류 제조회사는 좋은 의도였겠지만 그 선전 문구를 보는 동안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멋진 흰머리에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그윽한 주름으로 관록을 보이고 싶지, 결코 늙은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고자 회초리나 들고 싶지 않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검은 머리가 허연 머리 패면 싸가지 없어 보여 손가락질 당한다. 그러다 아들 먼저 죽기라도 하면 아마 ‘가슴에 대못’일 것이다. 그렇다고 짜글짜글한 독거노인으로 연탄불에 라면 끓여먹다 가스중독으로 가는 건 더더욱 사양한다. 이 모든 추함보다 두려운 건 노망나서 벽에 똥칠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늙으면 좋아하던 여자/남자들도 다 떨어져 나갈 텐데 무슨 재미로 오십년을 더 살자는 말인가?

폼 나게 늙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이면 돈, 건강이면 건강, 친구면 친구, 일이면 일, 모든 것이 다 제대로 필요하다. 그것도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수준으로 갖춰야 체면이 서고 ‘폼’이 난다.

젊어서는 종이컵으로 자판기 커피 뽑아 벽에 기대서서 후루룩 마셔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비쳐 좋았지만 늙어서 그러면 청승이다. 나이가 들면 인생을 반조하는 우수에 찬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고급스런 찻잔에 담긴 차를 천천히 마셔야 격이 산다는 말이다.

옛말에 개도 ‘뺨’이 있어야 ‘망건’을 쓴다고 했다. 비록 지금껏 개같이 살았을지라도 폼 나는 늙음을 즐기려면 이제부터라도 멋진 ‘망건’을 쓰기위한 ‘뺨’ 만들기에 착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뺨’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 것도 챙기면서 남들이 하는 건 어느 정도는 해줘야한다. ‘뺨’만들기로 요즘 각광받는 ‘인생 이모작’이 있다. 그래서 ‘인생 이모작’의 작황으로 나머지 50년을 살아야 하는 ‘생의 한가운데’ 놓인 세대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공자는 어려서는 시를 배우고, 젊어서는 예를 하고, 늙어서는 음악을 하라(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충고하였다. 고대에 시(詩)는 달 밝은 밤에 배 띄우고 술 한 잔 걸치면서 읊조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의 이름이나 언어와 문법을 운율이나 동요 혹은 민요형식의 노래로 습득하는 방식이었다. 예는 문화 형식과 인간관계의 처신을 몸에 익히고 전문성을 정교하게 연마하는 젊은 사람이 할 사업이었다. 음악은 감정의 조화와 사회적 통합이라는 예식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인자하고 부드러워 ‘광’나는 노친네가 해야 제격인 감정 다스리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사회에서 음악을 즐기며 연주하는 사람들은 자금에 여유가 있는 50대나 60대보다 10대나 20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실상 젊은 사람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마치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 새가 지저귀고 벌레가 우는 것같이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랑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공자가 말하는 감정의 조화라는 의미로서의 음악은 아니다. 공자의 이론으로 보자면 10대가 하는 음악은 학습과 짝짓기를 위한 감정의 노래이고, 30대와 40대의 음악은 정교한 기교와 완성도 높은 전문가의 연주일 것이다.

공자가 음악으로 완성하라고 주문했을 때는 ‘소녀시대’처럼 끝내주는 기교의 춤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싸이’의 ‘말 춤’처럼 열정적인 힘을 보여주라는 주문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노친네가 젊은이들이 하는 힘과 기교를 보이면서 짝을 유혹하려고 하면 노망 판정 전에 먼저 골병으로 실려 갈 것이다. 그러니 노친네가 하는 음악은 정서적인 자기완성에 초점이 있다고 하겠다.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몰입했다는 공자의 음악도 실상 거문고를 통해 음률을 맞추는 일이었다고 한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친네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음악은 바로 완숙한 정서적인 조화를 보여주는 자기 조율에 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닳고, 풀어지고, 조율이 틀어져 쉽게 격해지는 ‘자신’이라는 악기를 발견하게 된다. 풀어져 한 곳에 치우친 정서와 성정(性情)을 반성하고 세상이라는 대음악과 어울릴 수 있게 몸과 맘을 튜닝하여 조화를 이루는 일이 바로 조율이다. 자기완성을 위한 음악은 감성의 조율이기에 즐거움(樂)일 수밖에 없다.

일전에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던 전자기타를 샀다. 기타를 치지는 못하지만 꿈을 꾸는 듯 그윽한 눈으로 기타를 바라보며 앉아서 천천히 줄을 맞춰본다. 한동안 그러다가 옆에서 불타는 눈으로 기타를 갈망하는 장성한 아들에게 잠시 빌려주고는 방에 들어간다. 방에 들어와 『초보자를 위한 이정선 기타교실 DVD』을 열심히 익히며 나름의 ‘뺨’만들기에 열중한다. 이러다 보면 나머지 50년 이내에는 언젠가 나도 이릭 클랩톤(Leeric Clapton)이라는 예명으로 밴드를 조직해서 멋지게 블루스를 연주할 날이 올 것이다.

이제 백세까지 살아야 한다고 쫄거나 떨지 말자. 폼 나게 나를 조율하고 몸과 맘을 완성해 나가며 밴드를 조직해서 활동한다면 백세도 짧다.

첫 ‘농사’로 가족을 이루고 부양하며 전문인으로 사회 속의 자기를 만들었다면, 조율이라는 자기완성의 즐거움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농사는 장성한 자식조차 “언젠가는 아버지를 따르겠다”고 결심할 만큼 폼 나고 작황도 풍요로우리라.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를 테다. 지금껏 내 삶이 ‘강아지’였을지라도 이제는 새로 마련한 기타와 함께 내일의 ‘망건’을 위해 ‘뺨’만들기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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