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08 09:00
세계적 흥행을 불러 일으킨 영화 '스타워즈'의 장면. 대단한 창의성을 선 보인 이 영화의 감독 조지 루카스는 정작 미국 영화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으로 대담한 창의성을 드러낸 경우다.

품격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등의 쓸모조차 없는 물건을 ‘산지기 집의 거문고’라고 한다. ‘창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격조’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창의’는 그저 ‘산지기 집의 거문고’일 뿐이다.

애플의 창업자였던 스티브 잡스의 “다르게 생각하기 Think Different”를 필두로 ‘창의’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성공한 CEO의 사업 경험담이 우리에게 조금은 필요하겠지만 그에 취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쥐떼처럼 몰려가면 패가망신한다.

고기도 먹던 놈이 먹고, 연애도 해본 놈이 한다. 우리는 창의에 대가를 지불한 적이 없기에 ‘다르게 생각하기’는 시인 이상(李箱)의 말대로 스스로 ‘박제’가 되는 지름길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야 안전하다는 말이다. 자연사 박물관에 멸종된 희귀동물의 박제로 남고 싶다면 ‘다르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

요즘 애들 ‘싸가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집트 피라미드(Pyramid) 발굴문서에도 등장하는 이 문구가 지금도 쓰이는 건 아마 ‘젊음=싸가지 없음’의 등식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리라. 거창하게 말하자면, 피라미드 이래로 인류의 역사는 싸가지 주입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개념 찬 세대가 가고 새 세대가 등장하면서 싸가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생산단계에서부터 “민족중흥”이라는 개념 주사액의 주입이었다.

만약 키워준 8할이 유신과 5공화국이었다면 결코 보통사람이 될 수 없는 비범한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그 때는 부모님도 목적의식을 빡 채워서 우리를 만들었다. 맘에 없는 중매결혼에 밤이면 땀을 뻘뻘 흘리는 난이도 높은 체위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자손을 생산했다. 보통 특정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사물을 목적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뻑’난다. “민족중흥”을 위한 생산품에게 용도에서 벗어난 ‘창의’를 요구하면 헛돌거나 하나마나한 삽질로 결말을 맺는다는 얘기다.

우리는 피라미드 세대 이래 약 100여 세대를 이어 싸가지의 점입가경을 보여준 ‘애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족중흥‘이라는 ‘싸가지’를 머리에 파 넣은 개념 찬 ‘개량종’이라고 우기고 있는 중이다.

영화사에 가장 중요한 영화는 오손 웰슨이 감독부터 청소까지 일인군단으로 이룬 <시민 케인>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개념을 밥 말아먹었다는 의미에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도 그에 못지않다.

미국에서는 영화협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영화를 못 만든다.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는 영화협회가 밥맛없어서 가입하지 않고 독립영화 감독으로 남았다. 협회원이 아니니 직접 영화를 만들 수 없어서 바지감독을 세워 객원으로 감독했다고 한다.

할 일 없이 시간 죽이려고 무협지와 팬픽(Fanfic)이나 읽으며 소일하는 인간을 ‘잉여’라고 한다. <스타워즈>는 <쥬라기 공원>같이 미래 사회를 걱정하는 건실한 공상소설(Science Fiction)영화가 아니라 그냥 “옛날에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을 몽상(Space Fantasy)하며 그린 ‘무협 활극’이다. 조지 루카스라는 난데없는 미국식 ‘잉여’가 전 세계인을 극장 앞에 줄 세웠다.

‘민족중흥’ 엔진을 탑재한 인간 만들기는 크게 성공했다. 모든 길은 ‘민족중흥’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특수 용도로 제작된 초강경 두뇌는 ‘놀이’라고 쓴 뒤 그를 ‘퇴폐’라고 읽고, ‘창의’라고 써놓고서는 ‘외계인’ 혹은 ‘사차원’이라고 읽는다. 기업 채용 공고에서는 ‘창조적인 인재’라는 지침을 써두고 ‘배경 좋고 순종적인 사람’만 뽑는다. 이를 보건대 ‘창의’의 진정한 용도는 밥 먹고 씹는 껌이다. 단물 빠지면 뱉는 게 껌 아니던가?

하지만 온 사회가 ‘민족중흥’을 위한 ‘한 목소리’로 창의를 노래하는 한 우리에게서 잡스나 루카스는 나오지 않는다. 각기 다른 ‘여러 목소리’인 ‘창의’를 근본적으로 잘못 읽고 있기 때문이다. 노는 데 창의적이면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민족중흥’을 위해 일하는 데 창의적이면 아래 사람들 피곤하게 하거나 잘 노는 사람 방해한다. 노는 데 필요한 물건의 용도도 ‘한 목소리’로 변경하면 오작동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의란 민족의 운명을 걸고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것이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되니까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므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즐기지 못하면 피하는 자발적 참여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나대지 마라(不敢爲天下先)!” 노자는 누울 자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자리를 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하지만 그가 보는 세계는 너무 현실적이기에 비극적이다. ‘창의’란 현실을 벗어나 ‘개념’과 ‘싸가지’를 잊고 어딘가 모를 멀고 먼 우주로 날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장자(莊子)는 참 즐겁다.

혜시(惠施)는 개념 없는 친구인 장자(莊子)를 비꼬았다. “위나라 왕이 박씨를 주기에 심었더니 거대하게 자라더군. 물을 담기에 너무 무겁고, 잘라 표주박을 만드니 평평해서 뭘 담을 수 없었네. 터무니없이 크지만 쓸모가 없어서 부숴 버렸네.” 이에 장자는 먼저 “자네는 참으로 큰 걸 쓰는데 서툴구먼!”이라며 기선을 제압한다. 그리곤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며 성공사례를 들어 빈정거린다. 곧이어 ‘쓸모’만 생각하는 굳고 단단한 혜시의 머리를 ‘창의’의 ‘망치sledgehammer’로 부수어 버린다.

“그런 박이 있다면 당근, 호수에 띄워서 타고 놀아야지!”라면서 말이다. 이제 우리 마음속의 산지기는 거문고를 어떻게 쓰고 다룰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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