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진혁 기자
  • 입력 2019.02.21 14:00

지배구조 선진화와 투명경영 통한 사회적 가치 추구로 주가 상승 기대
정부 대기업정책과 국민연금 압박도 영향…다른 대기업에도 영향 줄듯

SK하이닉스 기공식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 (사진제공=SK하이닉스)

[뉴스웍스=장진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등과 함께 재계 3세 오너체제에서 사실상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그룹 지주회사인 SK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난다.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하고 사외이사 중에서 의장을 선임하도록 권고하는 선진국 흐름에 따라 지배구조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그룹 자산이 200조원대로 뛰어오르면서 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분석된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SK는 오는 5일 열리는 이사회에서 최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안건을 상정, 처리할 방침이다. 최 회장은 2016년부터 SK 대표이사 회장과 이사회 의장을 겸직해왔으나 오는 3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회와 경영진을 분리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이사회의 기능에 부합된다. 최고경영자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면 잘못 경영하더라도 이사회로부터 견제를 덜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다음달 의장에서 사임하더라도 대표이사 직책은 유지한다. 그는 SK에서 장동현 사장과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신임 이사회 의장에는 염재호 고려대 총장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염 총장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2015년부터 고려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염 총장의 총장 임기는 이달 말까지로, 총장직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SK 사외이사로 이동해 이사회 의장을 맡을 것으로 전해졌다. 염 총장은 SK의 신규 사외이사로 영입된뒤 이사회를 책임지게 된다. SK는 3월 말로 예정된 정기주주총회에서 의결할 예정이다. 

최  회장이 SK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면서 사내이사가 맡고 있던 주요 계열사 이사회 의장도 모두 교체될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에서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 운영할 계획이다. 3월 주총에서 사외이사 중 1명에게 이사회 의장을 맡길 방침이다. SK그룹 내 주력 상장사들이 경영진과 이사회를 분리하면서 염 총장과 같이 그룹 외부 출신의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게 되는 인사가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 증시 시가총액 1위인 정보기술(IT) 기업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은 지난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한다며 에릭 슈밋 회장이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났다. 알파벳은 스탠퍼드대 총장 출신의 컴퓨터공학자 존 헤네시를 이사회 의장으로 앉혔다. 고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의 이사회에서 현실성없는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 일선에서 쫓겨난 바 있다.

최태원(왼쪽 세 번째) 회장이 2019년  SK 신년회에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SK)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운영으로 글로벌 스탠다드 흐름 동참

SK는 SK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을 이루는 회사다. 자산 200조원 규모의 107개 계열사에 대해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한다. SK이노베이션(33.4%)·SK텔레콤(25.2%)·SK E&S(90%)·SK네트웍스(39.1%) 등 핵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SK그룹 전체 영업이익의 84.3%(20조8438억원)를 벌어들인 그룹 최대 계열사인 SK하이닉스도 SK텔레콤을 통해 지배하고 있다. SK텔레콤은 SK하이닉스 주식 1억4610만주를 보유한 1대 주주다. 다만 지분율은 20.07%로 2대 주주인 국민연금(9.1%)과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그룹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최 회장은 2014년 모든 계열사의 등기임원직에서 물러났다가 2016년 사내이사로 복귀한뒤 3년간 대표이사 회장(등기임원)와 의장으로 근무 중이다. 이에반해 최 회장은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주요 계열사에선 미등기임원으로 있다.

이론적으로 주식회사는 주주가 이사회에 경영을 위임하고, 이사회는 대표이사에게 다시 통상적인 경영을 맡긴다. 중요한 안건은 이사회를 열고 의결한다. 이사회는 경영진을 감시·감독하고 주주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면 의사결정 절차를 줄일 수 있어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고유한 기능 수행에는 제한을 받게 된다.

그간 최 회장은 SK 대표이사 회장으로 통상적인 경영을 수행하면서, 이사회 의장으로서 상법에서 규정한 경영상 중요한 안건까지 함께 처리해왔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들도 오너 또는 최고경영자(CEO)가 이사회 의장까지 겸임하고 있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통한 강력한 집행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자산규모 1000억원 이상 1087개 상장사 중 935개사(86%)의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해 상충 문제가 커지고 이사회의 경영진 견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 회장이 스스로 SK의 지배력을 내려놓는 것은 기존 지배구조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채택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원칙 등은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하고, 사외이사 중에서 의장을 선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고 이사회가 경영진을 독립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해야 장기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지배구조를 갖추면 해외 투자자를 유치하거나 주가를 높이는데 유리할 수 있다. 최 회장은 통신과 반도체 부문의 지배구조 개편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SK(주)의 기업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할 입장이다. 

최 회장이 강조해온 '사회적 가치 경영'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최 회장은 1월 2일 열린 그룹 신년회에서 "성장과 안정이 지속적이려면 (높은) 매출과 영업이익보다 구성원의 행복과 성숙도 있는 공동체를 잘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면서 구성원의 개념을 고객·주주·사회·협력업체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사회 의장이 주주들의 권한을 대표하는만큼 의장의 역할을 강화하고 이사회 의사결정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인다면 해댱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최 회장은 신년사에서 “더 큰 행복을 만들어 사회와 함께 하자”고 강조하면서 사회 공헌에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간의 준비도 한 몫을 했다. 최 회장은 지난 2004년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그룹 경영권을 공격했을 때 “가장 선진적인 지배구조로 평가 받고 있는 미국 GE보다도 더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이사회로 만들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SK그룹은 이사회의 독립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이사회 활동의 평가 기준을 설립하고 있다. '이사회 평가 모형'도 개발중이다. SK는 지난 2016년 거버넌스위원회를 설립해 주주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이사회가 사전 심의하는 제도를 설립하기도 했다. SK그룹은 소액주주들의 주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자투표제를 다른 그룹보다 선제적으로 도입했다. 기업이 전자투표시스템에 주주명부와 주주총회 의안을 등록하면 주주들이 주주총회장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 전자투표 시스템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SK와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에서 시행 중이다. SK하이닉스와 SK네트웍스도 도입하기로 한 상태다. 

청와대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출처=청와대 홈페이지)

◆정부 대기업 정책 압박에 대응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총수와 그 일가에 집중된 대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결정이라는 분석이다.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한뒤 대기업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연말  ‘2018년 대기업집단 자발적 소유지배구조 개편 사례’를 발표하면서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 것을 모범사례로 들었다. 다른 재벌 기업도 이처럼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공식화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주주총회 이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 운영하고 있다. 당시 권오현 대표이사 회장은 "균형 잡힌 이사회 운영으로 주주의 신뢰를 높이고, 이사회는 효율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압박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국민연금은 SK하이닉스의 지분 9.1%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지난해부터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행사 강화를 천명해왔다. 스튜워드코드  행사 여부를 판단할 때 지배구조 분야에서 19개 항목을 평가한다. 여기에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 여부가 들어있다.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다음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잠재적 후보군 중 하나로 SK하이닉스를 지목해왔다. 

물론 정부가 이런 방침을 세운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사회의 경영진 감시 기능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1087개 상장사 이사회에서 수정·부결·보류한 안건은 0.2%(41건)에 그쳤다. 이사회가 경영진의 결정에 찬성만 하는 '거수기' 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최근 이웅열 코오롱 그룹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서 전격 퇴진한 데 이어,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도 향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글로벌최고투자책임자(GIO)는 네이버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난데 이어 작년 3월 네이버 등기이사직도 내려놓기도 했다.  대기업 오너들의 ‘소유-경영 분리’ 기조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최 회장은 이처럼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 그룹 총수로서 갖고 있는 막강한 권한 중 일부를 포기했다. 삼성에 이어 SK가 투명경영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다음달 주총 시즌을 앞두고 경영진과 이사회를 분리하는 상장사가 점차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