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11 13:49
홍콩 주성치가 주연한 쿵푸허슬의 포스터. 영화 속 주성치가 조폭들을 제압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무대가 홍콩인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이었던 구룡 성채다. 전란과 재난을 피해 터전을 옮겨야 했던 많은 중국인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2009년 7월 27일부터 중국 상해(上海)에 있는 월급쟁이들이 일찍 집에 들어가 시청하려고 열광했던 드라마가 있었다. 방영한 지 4일 만에 시청률이 7%에 이르렀던 33편짜리 이 드라마의 제목은 <달팽이 집(蜗居)>이다, 내용은 방값과 물가가 치솟는 도시 생활 속에서 시골 출신의 자매가 상경하여 고군분투하며 결국 마이 홈을 얻게 되는데 월 대출 원금과 이자로 큰 돈(드라마에서는 6천 위안, 약 108만원)원이라는 거금을 매달 갚아나가며 어렵게 살아나가는 대도시 시민들의 이야기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중국 내 국공 내전(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이 더 번지고 중화인민 공화국 건국, 문화대혁명이 이어지면서 많은 피난민들이 홍콩에 들이 닥친다.또한 20세기 중 후반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자연재해 (1962년의 웬디 태풍, 1964년의 루비 태풍, 1971년의 루시 태풍, 1979년의 팁 태풍 등 수차례 들이 닥친 10호 급 슈퍼 태풍)의 영향으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수많은 이재민들과 외부에서 들이 닥친 피난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홍콩 땅에서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초기의 피난민들과 이재민들은 주로 구룡 지역 사자산(Lion’s Rock)아래나 신계(New Territory) 지역 여러 곳에서 달동네를 형성하며 살았다. 이들이 주거했던 형태는 주어온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간략히 만들어진 木屋(나무 판대기 집)이나 鐵皮屋(철판 집)으로부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이런 집은 없어졌지만 홍콩 서민들의 거주 환경은 거주 면적 면에서 여전히 워쥐(蜗居, 와거:달팽이 집)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수많은 서민들 중 일부는 심지어 그 안에서 㓥房(당방: 방을 여럿으로 나눠 놓은 것을 말함) 또는 籠居(롱쥐: 방안에서 철장을 만들어 그 안에 사는 방식), 牢笼(라우롱: 우리), 鷄籠(지롱: 닭장) 등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1인당 활동 가능 면적이 1.5평을 넘지 못했다.

탕러우(唐楼) 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지어진 지 오래인 건물과 좁은 방으로 이뤄진 빌딩이 밀집한 지역을 가리킨다. 구룡 지역에서는 이런 곳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구룡에서 가장 대표적이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사자산 아래에 있었던 구룡 성채(九龙城寨)라는 곳이다.

원래 송나라 때부터 관부장(官富场)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관방(官方) 염전(鹽田)을 관리 했던 곳이었다 한다. 청나라 때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 식민지로 속하자 청대의 관청으로서 영국인들의 행동을 관찰했던 곳이었다가 영국이 심천하(深圳河) 이남 전 구룡 지역에 대해 99년간 임대를 하면서 독특한 기능을 수행했다. 영국과 청 조정의 합의에 따라 이곳 구룡 성채만은 청 관할 지역으로 놔두었으며 그 후 중화민국 건국 및 군벌 시기 그리고 국공 내전 등 여러 정권의 변화에도 이 지역만은 영국도 관여하지 않고 중국 쪽에서도 행정권 밖에 있었던 치외법권 지역 이었다.

이 지역에 대륙으로부터 흘러온 피난민들과 이재민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들이 닥치면서 마약 판매상, 홍등가 매춘 업자, 삼합회 등 마피아, 불량 어묵 제조업자 및 대륙지역에서 홍콩에 피난 온 불법 치과의사 등이 이 7800평 밖에 안 되는 지역에 모여 살아야만 했다. 1898년 면적이 0.044㎢(대략 13,200평)였던 이곳 구룡 성채의 면적은 1987년 0.026㎢(7800평)으로 줄어들었다. 때문에 우리 서울시 시청 앞 광장의 두 배 만한 이 면적 안에서 1995년 철거되기 전까지 3만~5만명이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은 이 조그만 면적 위에 불법 건조한 15층짜리 탕러우(唐楼) 빌딩에 탕팡(㓥房), 롱쥐(籠居), 라우롱(牢籠), 지롱(鷄籠)을 만들어 놓고 살았으며 한때 1㎢당 170만 명이라는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기록하여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도 한다.

이러한 구룡 성채는 또한 수많은 홍콩 및 외국 영화의 무대이기도 했다. 우리한테 익숙한 주성치(周星驰)의 2004년 작《쿵푸:功夫 Kung Fu Hustle》에서 나오는 저롱성채(猪籠城寨) 마을과 성항기병<省港旗兵>、중안조《重案组》、O기 삼합회 당안《O记三合會檔案》등에서 경찰과 홍콩 마피아들의 충돌 장면은 대체로 이곳을 무대로 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장치 예술가인 Taishiro Hoshino는 홍콩의 구룡 성채의 일부를 그대로 일본 가와사키에 있는 川崎倉庫遊戲機公園에 재현해 놓았다 한다. 구룡 성채는 현재 구룡 성채 공원으로 변했다.

공원 안 전시장에는 몇 장 안 되는 옛 사진들과 빌딩 군들을 조각 작품으로 남겨 전시하고 있지만 이미 아담한 송나라 때 공원으로 변해 버렸다. 홍콩의 뒷골목 문화가 화려한 쇼핑 및 금융이라는 간판에 가려진 셈이다. 그 좁고 어두우며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위험하기도 한 환경 속에서 모질고 끈질기게 살아났던 홍콩 사람들의 기억도 그렇듯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 드라마 《蜗居:와거》에 나오는 다음 한 구절이 귓가에 울려 퍼진다.

“资本市场本来就不是小老百姓玩的,但是他们偏偏又逃不了充当配角的命运”. 그 뜻을 옮기자면 “자본시장은 원래부터 우리 같은 소시민이 노는 데가 아니지,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그 시장에서의 엑스트라 역할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라는 뜻이다. 왠지 공명이 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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