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15 10:51
TV를 '바보상자'라면서 그 기능을 폄하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럴까? 삶이 고즈넉하지만은 않은 것이라면 우리는 TV를 통해 적지 않은 위안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TV를 보면 수명이 짧아진다는 실험결과를 접했다. 연구자들은 TV를 본 사람을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TV를 보지 않은 ‘동일인’도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둘의 죽은 시간 차이를 발표했을까? 어떻게 수명과 TV의 관계를 계산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사를 보고 TV를 보지 않겠다기보다 ‘TV님’은 참으로 너그러우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비방하고 헐뜯어도 묵묵히 뉴스를 보도하고, 모두가 ‘바보상자’라고 놀려도 수능의 70%가 출제되는 EBS 강의나 지식의 보고인 BBC 다큐멘터리를 들어 반박하지도 않는다. 어느 무엇에 대해서도 당당한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이미지다.

사람의 뇌는 잠을 잘 때보다 TV를 볼 때 적게 활동한다고 한다. 참으로 ‘바보상자’라는 말이 놀랄 만큼 맞아 떨어지는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TV 보다가 바보 된 사람은 없다. 어쩌면 아예 부적절한 비교 방법일지도 모른다.

잠잘 때의 뇌는 종종 깨어서 격렬히 활동할 때와 비슷하다. 그래서 TV 시청하는 행위를 ‘잠’과 비교하는 일은 100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사람과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이를 비교하는 것처럼 정말 공평하지 못하다.

우리는 가끔 ‘멍’해지는 경우가 있다. 퇴근해서 귀소본능에 따라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그 자체가 ‘멍’이다. 보기 위해서 TV를 틀기보다는 ‘멍’해지기 위해서 켠다. 퇴근 후 귀가한 여자는 TV를 남자보다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마치 자신의 생각과 말을 손가락으로 대신하려는 듯 TV 채널 서핑을 한다. 그 때 자주 바뀌는 TV채널의 말과 감정을 잘 모으면 여자가 남자에게 하고픈 말이 될 듯싶다. 남자보다 여자가 좀 더 다양한 채널을 선택하여 말하는 ‘다양한 바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TV를 보면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보’가 되기 위해서 TV를 보는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잠자는 것보다 뇌를 덜 사용하는 ‘TV 보며 멍 때리기’는 잠들 힘도 없을 만큼 지친 생명이 고갈된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전략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TV는 진정 ‘멍 때리기’라는 ‘생리작용’을 위해 태어난 축복이다. 노자(老子)에도 “사람들은 밝은데 나만 어둡고,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만 멍 때린다(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라며 ‘멍’을 찬양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자의 문맥으로 보자면 ‘멍’은 어린아이와 같이 개념에 집착하지 않고 근본을 파악하는 마음(常無欲而觀其妙)을 갖기 위한 머리 제대로 비우기의 준비운동인 듯하다.

노자에서 더 멀리 나아간 ‘멍’ 때리기의 성전인 장자(莊子)에는 더 적극적으로 ‘멍’의 의미가 드러난다. 장자는 자신과 TV의 구분을 잊고 소파에 앉아 ‘멍’해지는 모습을 ‘좌망坐忘’이라 했다.

조용히 한 채널을 틀어놓고 관조하면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혼돈(混沌)’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즉 장자는 멍 때리기를 ‘자기’와 ‘세상’ 그리고 사물과 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을 통으로 날려버리는 정신의 활동으로 본 것이다. 장자의 이론을 생각하면 TV를 화두로 좌선을 하고 있는 부처를 형상한 백남준의 <TV 붓다>라는 작품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여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은 TV보다는 건전한 활동에 있다. 특히 아이들의 TV시청은 부작용이 심각하기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건전한 여가활동과 TV 사이에서’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입이 ‘열려 있기에’ 말하는 듯하다.

학자들의 말대로 우리에게 TV시청보다 해야 할 바람직한 활동은 많다. 하지만 할 수 없을 뿐이다. TV는 손가락만 까딱이면 우리 대신 말도 하고 웃어주고, 울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활동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마음의 ‘여유’와 ‘자유’ 그리고 ‘감정’을 동원해 웃고 울어야 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죽도록 공부하고, 감시와 모멸로 업무를 마칠 때쯤이면 이미 몸과 마음의 ‘여유’는 파김치기 되어 후들거린다. 이 때쯤이면 생산적인 여가활동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고등학교 3학년은 아니지만 삶은 고3 같지 않은가?

이 정도면 애들을 TV와 멀리하게 만드는 해결책의 그림이 나온다. TV를 끄고 건전한 여가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보다 먼저 애들의 삶에서 공부와 학원을 치워주고, 집과 책상에 가두어놓은 아이를 풀어주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먼저 몸으로 꿈틀거린다.

놀려고 해도 놀아 봤어야 노는 것이다. 학원과 학교, 집과 책상에만 가둬둔 사람에게 제대로 놀지 못한다고 야단치는 것은 망발이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만 가지고 논 사람은 다른 놀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가당찮게 평생을 묶어놓은 개에게 늑대를 대적하라고 하는 일과 같다.

즉, 우리가 제대로 놀지 못하면서 ‘TV나 보는’ 이유는 노는 ‘자유’를 사용할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나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사용법이란 어릴 적 태권도를 그만 둔 이후로 묶여 지내느라 잊은 자기 몸과 마음을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방법을 말한다.

자유롭게 노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중에 나도는 강박적 리스트의 결정체가 있다. 영화부터 여행지, 먹을 것 등을 열거한 ‘죽기 전에 봐야 할 100개’ 혹은 1000개, 심지어 100만 개에 달하는 시리즈다.

책에서 남이 권해주는 대로 매일 1000개씩 나름 보람찬 일을 하는 것도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다니며 정력을 소비하느니 내 맘대로 TV나 보는 ‘나태’가 나를 위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공자는 “할 일을 하고 힘이 남으면(行有餘力)” 자기의 관심사를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할 일을 한 후 파김치(行有無力)”라면 TV와 ‘멍’이 길(道)이요 진리요 그리고 자기 생명을 잘 보존하는 일일 수도 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