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2.19 14:54
당나라 유명시인 백거이는 인생 말년에 자신의 터전인 향산이라는 곳에서 노인 친구 여덟명과 함께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다. '구로'라는 단어는 이로부터 노인들의 즐거움과 장수 등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구로동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 일제 시기 중반까지 줄곧 경기도 등에 속해 있다가 광복 뒤인 1949년 ‘구로리(里)’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된 뒤 1950년 서울시 조례에 따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구로동의 이름은 ‘아홉(九)의 늙은이(老)’라는 뜻이다. 이 동네에 원래 아홉의 노인네가 살았다는 얘기인데, 실제는 어떤 모습일까. 그 정답을 얘기해 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대개 유래가 있는 법이다. 아홉의 노인네를 뜻하는 구로(九老)라는 말의 원전은 아무래도 과거의 중국, 그중에서도 역대 왕조 중 가장 번창했다는 당(唐)나라에서 찾아야 좋을 듯하다.

중국 역대 시인 중에서도 특이한 빛을 발하는 사람의 하나가 백거이(白居易 772~846년)다. 그는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함께 시가(詩歌) 문학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당나라 문단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문인이다. 인생 말년에 들어서 그는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렸던 모양이다. 그 동호회 비슷한 멤버는 백거이 자신을 포함해 모두 아홉이다.

따라서 그들은 동호회 이름에 ‘九老(구로)’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번성했던 도시 낙양(洛陽)의 동쪽에 있는 향산(香山)이라는 곳이 백거이의 거주지였으며, 아울러 모임을 주도했던 그의 역할에 따라 동호회 멤버의 만남 장소도 이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식으로 이름을 얻은 게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였다는 얘기다.

서울의 구로동은 아마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이름은 어쩌면 과거 조선, 나아가 동양사회에서는 스스로 키운 문화 바탕에 딱 들어맞는 말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노인을 공경해서 잘 모시는 ‘경로(敬老)’의 풍속 또는 그런 관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옛 동양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치던 것의 하나가 존로(尊老)와 상치(尙齒)다. 붙여서 ‘존로상치(尊老尙齒)’라고도 적는다. 앞의 ‘尊老(존로)’는 현재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敬老(경로)’와 같은 의미다. ‘높이다’라는 뜻의 ‘尊(존)’과 ‘공경하다’라는 뜻의 ‘敬(경)’이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궁금증이 이는 단어가 바로 ‘尙齒’다. 앞의 글자인 尙(상)은 ‘숭상하다’ ‘받들다’ 등의 새김이다. 앞에 적은 尊(존)이나 敬(경)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왜 이빨 가리키는 齒(치)가 등장할까. 이 글자의 쓰임새는 우리에게 매우 많다. 도시 곳곳에 들어서 있는 치과(齒科)를 가리키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자는 이빨과 함께 ‘나이’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먼저 흔들리고 빠지는 것이 이빨이고, 머리카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馬)의 경우는 세월에 따라 일정하게 이빨이 생겨나는 까닭에 말의 나이를 알려면 먼저 그 이빨을 확인한다. 사람도 나이 들어가면서 먼저 흔들리고 시려지는 게 이빨이다. 따라서 그 둘의 상관관계는 제법 깊다.

그래서 사람의 나이를 가리키는 한자 ‘年齡(연령)’의 齡(령)이라는 글자가 생겼을 테다. 齡(령)이라는 글자에 齒(치)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음에 주의하자. 정확하게 가르자면, 이빨을 일컫는 치아(齒牙)에서 齒(치)와 牙(아)는 서로 다르다. 같은 치아의 범주에 들기는 하지만 앞의 齒(치)는 잇몸에 누워서 음식을 씹는 어금니 등을 가리킨다. 뒤의 牙(아)는 음식을 물어 자르는 앞니 등을 지칭한다.

그래도 이빨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齒(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파생한 말들이 재미있다. ‘연치(年齒)’는 年齡(연령)과 같은 뜻의 단어다. 앞에 순서(順序)를 의미하는 글자를 붙여 만든 ‘서치(序齒)’는 우리 식으로 풀자면 ‘나이 순서’다. 서열을 정할 때 “민증(주민등록증) 번호대로 하자”는 경우에 쓸 수 있는 말이다. 활동력이 강한 장년의 나이에 있는 사람을 장치(壯齒)라고 적으며, 또는 ‘나무가 무성하다’ 할 때의 글자를 붙여 무치(茂齒)라고도 적는다. 나이 들어 이빨의 건강이 나빠지는 노인은 저녁을 뜻하는 글자를 붙여 모치(暮齒)라고 한다.

불치(不齒)라는 단어가 제법 흥미를 끈다. 우리 사전을 보면 ‘불치인류(不齒人類)’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 축에 들지 못함’이라는 새김이란다. 풀자면 이렇다. 앞의 不齒(불치)는 ‘입에 담지 못할(하는)’의 뜻이다. 齒(치)라는 글자가 ‘입에 담다’ ‘거론하다’의 뜻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럴 정도로 사람 됨됨이가 영 글러먹었다는 말이 ‘不齒人類(불치인류)’, 즉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이라는 얘기다.

이빨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자. 어쨌든 이빨은 결국 연령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고, 결국 尙齒(상치)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그런 전통은 동양 곳곳에서 ‘노인의 모임’을 가리키는 尙齒會(상치회)로 발전해 당나라 때는 백거이가 주도한 九老會(구로회)까지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때로는 그런 목숨을 생각지 않고 나서야 할 경우도 있으나, 그럼에도 사람에게 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하다. 따라서 오래 사는 일은 모든 이가 바라는 꿈이다. 오래 살아도 시름시름 앓으면서 버티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앓는 일 없이 오래 사는 일, 무병장수(無病長壽)가 최고다. 연년익수(延年益壽)도 가끔 쓰는 말이다. ‘오래 오래 더욱 장수하라’는 축원이다.

귀령(龜齡)이라는 단어도 있고, 학년(鶴年)이라는 말도 있다. 장수하는 거북이(龜)와 학(鶴)처럼 오래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비남산(壽比南山)이라는 성어도 있는데, 목숨(壽)이 아주 오랜 세월을 견디며 서있는 남산(南山)에 견줄(比) 수 있을 정도라는 얘기다. 역시 “무병장수하시라”는 기원이다. 노인들의 생신에 자주 쓰는 말이다.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요즘에도 자주 쓴다. 나이 들수록 더욱 강해지거나, 활력 있게 움직이는 노인들을 가리킨다. 원래는 장부가 뜻을 세울 때 ‘어려울수록 단단해지며, 나이 들수록 강해져야 한다’는 뜻의 ‘窮當益堅, 老當益壯(궁당익견, 노당익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영웅 조조(曹操)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묘사하듯 그런 간사한 인물이 아니다. 적수인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을 크게 압도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천리마가 구유(말먹이통)에서 먹이를 먹는 이유는 그 뜻이 천리를 내닫는 데 있음이요, 뜻을 굽히지 않는 이는 노년에도 그 장한 마음을 그치지 않는다(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

100세를 사는 시대라고 한다. 천리를 내닫기 위해 먹이를 챙겨 먹는 늙은 천리마,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서도 강렬한 뜻을 접지 않는 열사처럼 건강하고 왕성하게 살 일이다. 한국의 노인들이 생활 속에서 활기를 잃지 않고 늘 건강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지나치는 이 구로동의 의미도 바뀔지 모른다. 아홉의 노인네는 그야말로 120세, 또는 그 이상의 할아버지들일 것이다. 모든 노인이 건강한 육체와 활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 대한민국의 꿈이 아닐 수 없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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