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22 10:33
당나라 고승 임제대사의 초상이다. 창의적인 학습으로 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인물이다.

멘토의 시대다. 참 스승이 그립다 한다. 그런데 우리가 스승이 없어 이 모양 이 꼴이던가? 그렇지 않다. 스승이 있어서 부처가 깨달은 것도 아니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가 십자가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스승을 죽이지 못해서 그렇다.

당나라 때 스님 임제(臨濟)는 할(喝)!하며 시끄럽게 꽥꽥 소리 지르기로 유명했다. 설법은 더 과격했다. 그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했다. 화끈한 성격의 막가파 스님이다. 부처야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스승을 죽이라 한 건 인륜을 저버린 살인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살해하지도 않았고, 배신을 때린 제자들 덕에 살해당했다는 소식도 없다. 멋진 말도 많이 남긴 막가파였다.

당연히 임제의 말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은유조차 금지된 세상을 살아왔다. 이 말에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진 게 언제인데!” 라며 발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체벌 금지로 학생들이 대들고 날뛴다고 한다. 그럼 물어보자. 가르침이 폭력인가? 폭력이 없다고 사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학생을 폭력으로 밖에 대할 줄 모르는 자는 선생님이 아니라 그저 어린 약자를 때리던 어른 깡패였을 뿐이었다.

임제가 말하는 부처나 조사란 양아치나 깡패가 아니라 진정한 스승을 말한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다. 이런 스승을 뵈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그림자조차 밟기 두려워진다. 하지만 임제는 이런 분들의 가르침조차 밟고 지나가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자기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스승도 사람이니 약점도 있고 논리적 허점도 있으며 칼침도 놓아 죽일 수 있다지만 이미 죽어 사리만 몇 개 남은 부처는 난감하다. 불교에서 부처라 하면 법(法), 즉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임제가 바라는 바는 모두가 받아들이는 진리를 부정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확인해 볼 수 있다지만 자기가 속한 종교 집단의 진리를 의심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집단의 울타리에 머물 수 없다. 그리스도교에서 사도신경이 바로 그런 것이다. 크레도(Credo)라는 이름 그대로 교회 안에서 긁으면 신앙이 결제되는 ‘그리스도교의 크레디트 카드’다. 그런데 지금 임제는 그 카드마저 버리라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을 닮기 원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걷기를 바란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이다. 그분의 성취를 맛보고 그 가르침과 하나 되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스승의 발자취는 따라 걷는 길이 메카에 이르는 순례의 길이고, 야고보를 따라 걷는 외로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이자, 마오쩌뚱과 함께하는 힘겨운 대장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그마한 의문이 생긴다. 진정 스승들은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하는 코스프래를 원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따라 하기 명수인 원숭이나 앵무새가 가장 진리에 가장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건 아닐 것이다. 스승들의 치열한 삶에서 찾고자 하던 것, 그들의 자취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를 곱씹어보고 비판하여 자기에 맞는 진리를 찾으려는 모습이 더 스승이 바라는 길이리라. 그래서 진정한 스승이라면 자기를 딛고 넘어서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진리도 그렇다. 모두가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이를 비판하고 땅이 돈다는 지동설을 들고 나온 코페르니쿠스가 처음부터 지동설을 안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실험하며 의심해야 하는 것이 진리다.

그렇게 부처를 죽이는 일은 바로 생각하고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진정한 진리는 부처나 예수 혹은 공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다시 생각하는 일에서 비롯한다. 부처도 힌두교에서 시작하였지만 의심하고 생각하고 실천하여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한 떨기 깨달음을 만들기 위해 임제는 봄부터 그렇게 꽥꽥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절간 입구에는 “머리로 이해하려는 놈은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하고, 교회는 믿음이라는 크레디트 카드를 발급받기를 요구하며 “불신지옥”을 외친다.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이전 대통령을 숭배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종북’이라 하고 ‘수구꼴통’이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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