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2.24 16:04
갈색이 조금씩 초록의 빛을 띠는 봄의 길목에 겨우내 얼었던 땅에서 풀려나 대지를 적시는 봄물은 아직 차갑고 시리다. 봄을 맞는 사람의 심경이 복잡하면 그런 봄물은 더 시린 느낌으로 다가온다.

봄이 오면 물이 풀린다. 차가운 기운을 잔뜩 머금었던 흙에서, 그리고 바위에서 물은 조금씩 풀려 땅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저 순우리말로 ‘봄물’이라 표현하면 딱 좋다. 그에 상응하는 한자 낱말이 춘수(春水)다.

이 말을 써서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린 이가 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때 남당(南唐)의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이다. 그는 북송(北宋)에 패망해 포로로 잡혀 지낸 세월이 3년여에 이른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君主)의 신분으로서는 가장 높은 문학성을 지녔던 인물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 포로로 적에게 잡힌 뒤 갇혀 지내던 세월의 포한(抱恨)은 결국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에 올라타 천고의 유명 시문으로 거듭 태어난다. 악곡(樂曲)에 가사를 매기는 식의 창작인 사(詞)에 해당한다. 악곡의 문패는 ‘우미인(虞美人)’이다.

 

春花秋月何時了, 덧없는 세월 언제 끝이 날까,

往事知多少 지난 옛 일은 얼마나 알까.

小樓昨夜又東風 어젯밤 작은 누각에 또 봄바람 닿으니,

故國不堪回首月明中 달빛에 고개 돌려 내 나라 쪽 보질 못하겠습디다.

彫欄玉砌應猶在 화려한 난간과 옥섬돌은 그대로 있겠지,

只是朱顔改 그저 젊었던 내 얼굴만 달라졌을 뿐.

問君能有幾多愁 묻노니, 슬픔은 얼마나 클까요?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온 강의 봄물일 듯.

 

가여운 읊조림이다. 잔잔하면서 구슬프다. 일국의 군주로서 나라를 잃은 슬픔이야 끝이 없고도 남을 듯하다. 천고의 노랫말로 내용 전체가 다 유명하지만 근심과 슬픔의 크기를 표현한 마지막 구절이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다.

봄물은 얼었던 대지로부터 풀려 골짜기와 작은 시내를 거쳐 강에 이른다. 그런 큰 강에 겨울 내내 추위에 묶였던 물이 모이면 아주 도저한 흐름을 이룬다. 마지막 구절의 一江(일강)이라는 표현이 멋지다. 一(일)은 ‘하나’의 뜻이 아니다. 시작과 끝을 모두 일컫는다. 전체, 모두, 온의 뜻이다. 게다가 아직은 차갑기만 한 봄물, 춘수(春水)의 이미지를 덧댔다.

제 근심과 걱정, 슬픔의 크기를 빗댄 말로는 그야말로 압권에 해당한다.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중국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사라지는 물의 흐름에 관한 묘사도 그럴 듯하다. 온 강에 불어난 봄물이 마냥 동쪽으로 흘러 멀어지는 모양이다.

봄은 희망과 설렘, 바람의 계절이다. 그렇다 해도 봄을 맞는 사람의 심경이 복잡하면 그마저 어딘가 시리고 아플 수 있다. 이제 봄을 아뢰는 송춘(頌春)의 무렵이건만, 우리가 맞이할 새 봄이 조금은 어둡다. 경제와 안보, 외교의 굵직한 분야에서 드리우는 그림자들이 모두 짙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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