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8.09 05:00

 

(사진=박인기)

26일 새벽 3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축축해진 텐트를 꾸리고 나니 아침 8시30분. 새벽 비에 젖은 라 살베(La Salve) 롱 비치 길을 따라 선착장이 있다는 비치 꼭지점으로 향했다.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오늘도 걷는다. 하루 쉬고 난 근육은 욱신거림이 많이 풀렸다. 참 고마운 근육~.    

(사진=박인기)

몇 해 전 일본 남알프스 산행길에서 후배와 함께 살과 뼈 그리고 근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살과 뼈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근육은 본인이 직접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당찬 자신의 포부를 얘기하더라는 후배의 제자 이야기에 대해 "그렇지만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는 것도 살과 뼈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며 공연히 확대해석했다. 혹을 덧붙였던 '오발탄'의 기억... 암튼 그런 추억 속에서도 70살 근육을 계속 단련시켜야 한다. 

(사진=박인기)

건너편 SANTONA로 가려면 2유로를 지불하고 배를 타야한다. 비 내리는 아침 항구는 아무도 없어 쓸쓸하기만 하다. 내 뒤로 줄줄이 어디선가 한 두명명씩 순례객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이동중인 필자. (사진=박인기)

9시가 되자 건너편에서 다가 온 배를 타고 건너 또다시 함께 길을 찾아 걷는다.

불쑥 뒤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왔다며 넉살 좋게 말을 계속 건넨다. 영어 사용에 거침없는 사교형 미남 청년이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졸업하고 친구 세 명과 함께 빌바오에서 순례길에 나선 것이란다. 자기는 서울 명동에서 두 달동안 있어 봤고 일본 도쿄에도 갔었다며 동양사람이 반가운 듯 장황하게 자기 경험담을 늘어 놀는다. 순례길에선 누구나 상대방이 무척 궁금해지는 것 같다. 

(사진=박인기)

다가와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적극적인 모습이 마음에 쏙 들어 그 뒤로  한 시간 여를 한국에 대한 얘기, 바스크 지방에 대한 얘기 등의 많은 말을 섞었다. 결국 "왜 까마노를 걷느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며 정작 궁금한 질문을 던진다. 글쎄, 뭐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그 스페인청년이 기대하는 답변에 부응하는 것일까? 

“롱 웨이 민스 마이 웨이 어브 리빙~” 

내 나이 70살, 걷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말을 청년이 이해할 수 있을까? 암튼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갈림길에서 젊음은 디지털, 늙음은 아날로그에 의지하며 길을 찾는 도중 자연스레 각자 길로 멀어져 갔다. 

(사진=박인기)

1차 목표를 삼았던 노자(Noja)의  길에서 화살표로 방향을 인도하던 알베르게(Noja Aventura Albergue). 도착해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더 걸어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점심은 10유로의 순례자 점심으로 해결하고 정보도 확인했으니 출발, 다시 걷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사진=박인기)

길은 여러 갈래, 시골 마을길에서도 길을 인도하는 노란 까미노 화살표시가 친절하게 그려져 있다. 차가 달리는 넓은 국도길, 좁은 간선 길을 걷다가 화살표시가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면 종종 농가주택과 만나게 된다.

(사진=박인기)

길은 모두 통하게 마련이지만 ‘아차, 잘못들어 왔구나’ 생각하면서도 뜻밖에 만나게 되는 걷고 싶은, 예쁜 소로가 있다.

시골 사람들, 그들이 걷는 길 사는 길 또한 모두 까미노일 터이니 비록 조금 돌아 가더라도 농부의 소박한 삶의 흔적을 가늠해 볼 발품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사진=박인기)

‘아~ 이 골목길과 담벼락은 또 왜 이렇게 예쁜 것인가?’

(사진=박인기)

좁다랗게 이어지는 구부정한 골목길, 이어지는 돌 담벼락 자연질감에 박힌 주름진 세월은 푸른 이끼, 뒤틀려 꼬인 아이비 뿌리넝쿨, 사이사이 촘촘히 박힌 다양한 식물군을 보며 충분히 직관하게 되는데, 정작 감성은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파석 돌담 전체를 차라리 살아있는 예술로 감탄한다.

예술, 그래 예술은 생명이다. 파석을 감싸며 반복되는 틈새 시멘트의 독성조차 내리 쬐는 태양, 눈 비 바람의 거친 떨림 앞에서 독성을 휘발시킨 생명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그 기막힌 상극적 어울림의 포용성과 역사성, 인간이 쌓고 자연의 불인(不仁)함이 경이로운 예술을 잉태시켰다. 그것을 우리는 농부의 소박함이라 쉽게 부르곤 한다. 그러나 천지불인(天地不仁), 천지는 한 쪽으로 편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천지지도(天地之道)는 자연의 소박함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진=박인기)

오늘처럼 나도 비를 흠뻑 맞으며 까미노를 걷는다면 혹시...?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이제 시작, 비록 눈비는 아닐지언정 해풍 섞인 비바람은 이렇게 얼음처럼 차가운데, 아~ 낯설고 을씨년스런 초행길을 얼마나 더 걸어가야 주름진 돌담처럼 탈색 중화 발효될 수 있는 새 길이 열리게 되는 걸까?

(사진=박인기)

아마도 분명한 것은 나부터 중화 발효되어야 무심 고요 움직임의 결과물, 영적 떨림이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발효된 떨림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 모두 더 나은 울림의 천국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연과 예술이 떨림으로 융합되면서 함께 만들어지는 울림의 세계다.

(사진=박인기)

그런 세상 속에서 세칭 디자인은 우리를 예술세계로 안내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디자인의 흐름은 먹고 입고 사는 기본 문제에 너무 기능적으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 10% 상업적 효율성에서 벗어나 좀 더 본질에 다가서는 역설을 한번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비효율적 떨림과 울림의 세계를 모색하는 역설이 어쩌면 기계적 산업디자인의 길을 사람 냄새나는 자연적 생명디자인의 길로 한 단계 전화(轉化)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명디자안의 본질은 자유다. 자유는 존재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놓아 둠’,  곧 ”우리는 우리의 현존이 되게 그냥 그대로 놓아 둔 상태로 나타났다”고 했다. 인간됨의 본질, 자유는 역설적 균형의 자(慈),  소박의 검(儉), 양행하는 물과 같이 후(後)의 방법으로 생명디자인에게 사랑, 검약, 겸손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사진=박인기)

오늘도 역시 산 등성이에 시원스레 자리잡고 있는 BAREYO, ‘CAMPING LOS MOLINOS’ 캠핑사이트에 젖은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달려가 뜨거운 샤워로 하루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Thank you, Camino de Santiago!

(사진=박인기)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구나(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장자, 제물론)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Laredo→Santona→Noja(16km)→Arnuero→Bareyo 29.9㎞, 40,185걸음, 9시간30분 (까미노 참고용 : Laredo→Noja→Arnuero 26.6㎞, 6시간 30분)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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