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8.15 05:00
(사진=박인기)

침대를 지고 다니는 사람은 순례길에서 느긋하다. 백패커를 이르는 말이다. 엊저녁도 오후 6시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이미 빈 침대가 없었다.

배낭을 올려 놓거나 스틱을 올려 자리 확보해놓고 모두 산골마을 하나밖에 없는 바로 나갔다.

대체로 지자체가 운영하는 여관(municipal albergue)은 비교적 넓은 부대공간을 가지고 있다. 오늘 만난 잔디 마당처럼...

(사진=박인기)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텐트 치고 잠시 쉬다보니 내 뒤로도 하나 둘씩 들어 온다. 모두 백패커들이다.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다. 모두 일찍 떠난 자리, 느긋하게 샤워하고 아침 끓여 커피까지 마신 뒤 떠나는 사람들은 대개 백패킹을 즐기는 백패커들이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니는 것도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장단점은 이율배반적이다. 그가 저녁 늦게 도착하면 내가 좋고 내가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할 땐 그가 부럽다. 항상 이중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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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길흉도 마찬가지다. 길흉으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비가 오면 사람들은 길 나서기를 꺼린다. 그러나 ‘회오리 바람도 아침 한 나절을 못가고 소낙비도 하루 온종일 가지 못한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라고 했던가?

나의 경우처럼 폭우만 아니라면 적당한 비는 걷기에 최상의 날씨다. 게다가 도중에 비라도 걷히는 경우엔 세상이 돌변하는 무릉도원 속을 거니는 행복감도 들게 한다.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햇살 속에 만물의 생명활동이 눈에 띄게 기운생동해지기 때문이다. 길 속에 흉이 있고 흉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을 길 위에선 종종 느끼게 된다.

(사진=박인기)

8월 1일 오전 9시 출발. 대략 24㎏을 지고 매일 24㎞ 정도를 걷는 일은 이제 아주 익숙하다. 집 떠난 지 27일 째 되었으니 몸이 걷는 일에 적응하며 숙달된 것이다.

가랑비를 맞으며 걷는 오늘 아침길은 특히 상쾌하다. 호젓한 길, 수 많은 발자취가 쌓이고 쌓인 길을 나는 오늘도 걷고 살아가며 꿈꾼다. 젖은 잎은 싱그럽고 스치는 공기는 달고 부드럽다. 이따금씩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 아침 몸은 뛸 듯이 가볍고 마음은 깃털처럼 날아간다.

사상학적으로 태음인인 나는 평소에도 산을 좋아한다. 백호 호랑이 기질을 타고 났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바닷가 양(陽)의 기운을 듬뿍 받은 다음 날 오늘 같은 산 길은 그래서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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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들어서면 치솟은 유칼립스, 무성한 갈참나무와 푸르른 녹음 그리고 이어지는 농토와 사과나무, 흙담처럼 낮은 찔레꽃, 더 낮은 키의 고사리까지, 그 넉넉한 산길과 숲길의 어울림이 너무나 싱그럽고 자연스럽다. 한 발 더 딛고 나가 보라. 틀림없이 산길 실개천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품고 흘러내린다. 

(사진=박인기)

하늘은 태양, 계곡은 음(陰)의 상징이다. 계곡은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다툼없이 샘물, 실개천을 만들고 강을 만들며 천천히 음기운을 바다로 흘려보낸다. 강에 이를 때 쯤이면 음의 성질이 한층 성숙해진다. 혼례를 치를 준비하듯 비로소 파도에 맞설 의연한 음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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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생명태동의 자궁이다. 음과 양이 만나 혼례를 치루는 한바탕 축제마당이다. 강렬한 태양 빛을 받으며 거대한 해류와 더불어 한 몸을 이룬 강물은 생명의 신비를 잉태하며 38억년을 호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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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브리아 바다 수평선은 오늘도 여전히 천지지도(天地之道),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 하나를 이룬 이것과 저것의 경계선을 굳이 애써 찾고자 하는 고등생명체는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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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프랑스 아줌마부대 일행 중 한 분이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내게 던진 말이 생각난다. “우먼 이그지스트 비포 맨”... 그래 분명 시냇물처럼 졸졸거리는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더 적극적이다. 앞 선 생명체 여성, 뒤에 따라가는 생명체 남성이다. 

(사진=박인기)

상선약수(善若水),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 노자는 도를 물과 같다고 하고 여성성을 물로 비유하며 최상의 덕으로 찬미했다. 

(사진=박인기)

Unquera로 가는 길에서 lupa 대형 슈퍼마켓을 만나 이것저것 욕심껏 골랐다. 단백질이 필요하니 소시지, 식량도 챙겨야 하니 견과류와 건포도, 빵...당장 바게트도 필요하다. 아니 화이트와인도 있잖아~ 26유로... 익숙한 현실 맛 위주로 골라 담으며 생존모드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사진=박인기)

역시 집을 나서면 몸은 생존모드로 돌변하는가 보다. 늙은 이 카스텔라도 챙겨 넣고 힘차게 길을 떠났다. 배낭무게는 쉽게 25kg을 넘어섰고...

오늘 아침 알베르게 떠나기 전 택시를 기다리던  독일 처녀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You are very very famous on the Camino, because ... “ 그리곤 내 배낭을 가리켰지.

엊저녁 오스트리아 청년이 바에서 처녀들 둘러 앉혀 놓더니 또 나를  화제에 올렸던가 보다. 참 순수한 오스트리아 청년... 그 즉흥성이 오히려 순진무구하다. 순발력, 친근함, 은근함, 발랄함, 덤덤함, 능수능란함의 본색을 드러내는 길 위의 사람들, 모두 다 순례길에선 순수하다.

(사진=박인기)

다른 질감의 순수 소박한 사람이 또 있다. 방향이 나뉘는 로터리에서 길을 물으면, "까미노?" 하고 묻고는 친절하게 쏟아내기 시작하는 자세한 설명, 오르고 내리다 좌로 가거나 우로 가라는 말일 텐데 스페인어를 하나도 알아 듣지 못하는 내게 참기 힘들 정도로 그의 설명은 길다. “씨, 씨, 그라샤스~ “ 웃으며 찰칵! 함께 사진 찍고 각자 갈 길을 간다.   

(사진=박인기)

웅퀘라(Unquera)는 기차역이 있는 해안가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해안을 찾는 바캉스족들을 위해 서핑강습소, 레스토랑, 낚시 장비점, 호텔 및 기념품 상점들이 눈에 띈다. 이 곳을 경계로 다리를 건너면 아스투리아스 지역(Principado debAsturias)이 시작된다.

(사진=박인기)

바스크 지역(Pais Vasco), 칸타브리아 지역(Gobierno de Cantabrua)을 지나 이제부터 아스투리아 지역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 까미노 델 노르테를 기준으로 안내판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523㎞ 남았다고 적혀 있다.

오늘 목적지 팬듀엘래스(Pendueles) 3㎞ 전에 브엘나(Buelna)라는 동네가 나올 거란다. 거기서 알베르게 산타마리나를 찾아라. 값도 싸고 음식도 맛있을 거란다. 앉아 쉬고 있는 동양인이 신기한 듯 언덕에서 내려오던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와 전해 준 정보다. 와이키키가 고향이라며 영어가 반갑다는 할아버지는 정작 영어가 부자연스럽다. 친절하게 정 주고 쿨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사진=박인기)

다리 건너 아스투리아스 순례길은 오르막으로 부터 시작한다. 한참을 오르면 숨이 찰 터이니 앉아 쉬라고 벤치까지 마련해 놓았다. 무게의 원흉 화이트와인 한 병과 과자 봉지 꺼내 놓고 어부가를 부른다. 내려다 보이는 오른쪽 왼쪽 산 능선 너머 모두가 북쪽 노르테, 칸타브리아 바다다.

(사진=박인기)

또 올라오는 순례객, 움베르또 이태리 청년이 반갑게 인사하고 언덕길을 오른다. 헝가리에 왔다는 로싸 처녀도 앉아 쉬다가 떠났다. 오늘 나는 순례 언덕길에서 반갑게 인사 나누고 쉬다 가라며 빵을 건네는 길 위의 쉼터가 되었다.

오후 4시. 노숙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나도 부지런히 따라 나서야 한다. 7㎞, 혹은 10㎞  두 시간 길을 더...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칸타브리아와 달리 고원 산골의 지형적 특징을 보인다. 처음 걷기 시작하며 느꼈던 바스크 지방처럼..,

산길은 오르는데 숨이 차지만 오르고 나면 늘 천상의 정원처럼 세상이 멋지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골 마을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 풍경은 모두 소꿉장난처럼 오밀조밀 천진스럽기 때문이다. 도무지 심각할 이유가 없다. 산길에서는...어쩌면 산 길이 요단강 건너는 하늘길인지도 모르겠다. 오르기는 고단하나 오르고 나면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4m 폭의 대리석 길로 하늘을 향해 계속 이어진다.

(사진=박인기)

아스투리아스 지방 첫 마을 Pimiango 인상은 산타브리아 경우와 달리 기세가 강렬하다. 하늘배경 건물색, 넓은 주택 정원 등에서 차원적 위엄과 탈색된 고고함이 느껴진다.

바닷가 사람들은 지혜롭다. 상술부터 보통이 아니다. 산 마을 사람들은 은둔형인가?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들다. 물은 지혜롭고 산은 후덕하다더니 그러한가? 덕장(德將)이 사는 산골은 고요하고 지장(智將)이 사는 바닷가는 소란스러웠다. 그들 문화가 정말 그런가? 한번 겪어보면 알 일이다.

(사진=박인기)

오후 8시, 알베르게 카사 플로르(Albergue Casa Flor)에서 고단한 여장을 풀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Serdio, Albergue de Municipal→Munorodero→Pesues→Unquera→La Franca→Buelna→Pendueles 23.3㎞, 32,187걸음, 11시간 00분 (까미노 참고용 : Serdio, Albergue de Municipal→Pendueles 20㎞,5시간)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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