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8.18 05:00
(사진=박인기)

8월 4일 일요일 오전 8시 길을 나서며 지난 밤을 생각해본다. 사설 알베르게 레포소 Reposo del Andayon (www.reposodelandayon.com)에서 보낸 어제 밤을.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인연이었다. 약 9시간 동안 약 22㎞의 길을 걸어 찾아갔더니 첫 인상 느낌이 웬지? 너무 조용해서 긴장되었었다. 식탁에 10여명이 둘러 앉아 막 식사하려던 참이었던 것 같다. 여주인이 문 열고 나와 대뜸 "예약했느냐"고 물었다. 알베르게에 예약? 예약없이 왔다고 했더니 "마침 한 자리가 비어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알베르게 레포소 전경.(사진=박인기)

그러더니 나를 밖에 세워 놓고 먼저 옷 벗고 밖에 있는 샤워실에서 몸부터 씻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샤워한뒤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려 했더니, 이번엔 또 No~!. 내 옷은 벗고 바구니에 마련한 알베르게 옷으로 위 아래 싹 갈아입고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통과의례 후 들어가 먼저 온 사람들과 초면 인사 나누고 앉았으나 왠지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잘못 찾아온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식탁 분위기가 너무 차분하고 조심스러우며 엄숙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까지 12명을 식탁에 앉혀놓고 침팬지와 생활하는 동물학자 제인 구달 닮은 여주인은 거침없는 스페인 말로 저녁식사용으로 준비한 건강식 천연오일에 대한 맛, 준비한 만찬 건강음식의 특별함, 그녀의 삶의 철학 등에 대한 설명을 길게 늘어 놓는 것 같았다.

(사진=박인기)

고개 들어 집안 곳곳을 살펴보니 ‘역시 60대로 보이는 이집 주인이 좀 특별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보호와 자연주의 신봉자의 생활면모가 곳곳에 보있기 때문이다. 벽에는 나무장식으로 ‘Welcome, You are in an Eco Passive House. Love nature, Save the water... ‘ 선언문까지 만들어 놓았다.

(사진=박인기)

밖을 살펴보니 집 앞으로는 설악산 울산바위를 닮은 산이 버티고 있고 집 안팎 곳곳엔 그의 생활철학을 드러내는 기념품, 메모 글, 소품까지 벽 탁자 등에 빼곡하게 모아 놓았다. 다소 불편함이 컸으나 그녀의 신념, 준비한 식사, 와인, 후식까지 정성껏 준비하고 직접 서빙하며 즐거움을 나누고자 하는 그녀의 신조가 너무나 투철해 보여 점차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이념화된 의식이 쇠처럼 단단해도 마음 속 한 켠에는 지난 세월의 떨림과 울림을 경험한  생명존중 자연주의자 같지 않은가?

(사진=박인기)

 목적했던 리베다세야(Ribadesella)보다 약 6.1㎞ 못 미쳐 있는 예약전용 알베르게 레포소에서 그런 특별한 '원 나잇'을 경험했다. 

리베다세야 골목길.(사진=박인기)

약 1시간 걸어 어제 목표 삼았던 리베다세야를 오늘에야 도착했다. 그런데 마을길 골목길이 정말 너무 예쁘다. 아침 10시 물청소까지 이미 끝낸 주택 골목길의 바닥이 촉촉하고 골목을 돌아 나가니 동네마을 대리석 바닥 모두 깨끗하다. 청소한 뒤 물기가 남아있는 바닥이 너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계단 칼라 프로젝트’ 현장 모습.(사진=박인기)
(사진=박인기)

돌계단을 색깔로 칠하고 글씨까지 써 넣어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들자는 ‘계단 칼라 프로젝트’의 현장도 볼 수 있었다.

(사진=박인기)

꼬불꼬불 골목길 빈터를 살려 심어놓은 푸른 식물, 아기자기 예쁜 색칠의 의자와 화분, 그리고 꽃장식이 생활화되어 있는 예술창문의 동네 골목길, 어설픈 벽화로 칠해 놓은 우리네 벽화마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벽, 창문, 문에 다양하게 칠해 놓은 색채는 비슷할 수 있으나 이곳에는 진부한 형상으로 범벅된 거친 붓질이 없다.

마을 전체가 바다와 만을 끼고 있는 한 폭의 그림 같고 동화와도 같아, 별 헤는 한 밤 머물고 싶은 그런 마을이다. 꼭 다시 와서 이야기를 들으며 마시며 즐겁게 하루를 거닐고 싶다. 라베다세야 항구마을.이다.

(사진=박인기)

칸타브리아 바다를 향해 자리를 튼 산타 마리나 비치(Playade Santa Marina)는 조용하고 쓸쓸한데 은근하게 정겹다. Colunga로 향하는 해변 길에 바다를 향한 나무 벤취가 길게 늘어서 있다. ‘왜 그냥 가느냐’고 나를 배려하며 불러 앉힌다. 파도 소리에 바다 냄새가 확 밀려오고, 무거운 발걸음을 쉬게 함으로 편안함을 주는 산타 마리나의 태고적 숨소리, 들고 나는 생명의 맥박 소리...북쪽길 노르테는 해안길,산길로 순례객의 발길을 이끌며 따듯한 모성의 젖냄새로 혹은 부성의 땀냄새로 내게 깊은 위로를 준다. 70년 인생길, 그간 참 잘 버티며 참 잘 살아왔다고...

(사진=박인기)

리베다세야의 좋은 기억을 간직하자며 속으로 다짐하고 길을 나섰다. 지금부터 8시간을 더 쉼없이 걸어야 하는거리, 무려 30㎞가 넘는다.

(사진=박인기)

 또 다시 산길을 올라 능선길에서 바라보는 칸타브리아 바다는 하늘과 경계가 없다. 그런 하늘바다는 솜처럼 부드럽고 잔잔한데 그 빛깔은 소금처럼 짜고 하얗다. 

(사진=박인기)

산길에 취해 천상의 오솔길을 거닐 때 쯤, 오른쪽 칸타브리아 바다 가까이 위치한 Bar Terenes...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당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박인기)

시금털털했던 맛이 어느덧 익숙해진 ‘Sidranatural’ 한 병을 시켜 달게 마시며 잠시 고단한 나그네길 점심휴식을 취했다.

시드라를 따르는 전통주법을 선보이는 종업원. (사진=박인기) 

동양인의 시드라 주문이 신기한 듯 따르는 전통주법까지 선보이고 쿨하게 자리를 떠나는 친절한 종업원, 그의 삶도 틀림없이 진심으로 떨리고 있을 것이다.

걸어 가야 하는 길 너머 멀리 앞산 정상부분은 어느새 낮은 구름 속에 완전하게 묻혔다. 갈 길 먼 여정도 시드라(Sidra)에 취했는지 바닷가 정취에 묻혀 버렸다. 

(사진=박인기)

그렇지, 삶은 언제 어디서나  즐거워야 한다. 여기가 천상인가 지상인가? 여기저기 앉아 있는 도란도란 모습들이 진정 휴먼 빙, 인간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천국을 거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좌측에 산이 품고 있는 깊은 포용력, 우측에 바다가 품어내는 너른 생명력이 조화로운, 이 산길이 천국을 거니는 정원길이 아니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Norte del Santiago. 길은 속세의 길이 아니다.

(사진=박인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칸타브리아 바다,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가? 고개 넘어 나타나는 해안길은 종종 그렇게 계속된다.

노란 민들레꽃이 이 산길에도 지천으로 피고 지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훅 불면 날아가는 민들레 씨방같이 부유하는 우리네 인생, 그 삶 속은 무엇이 그리도 심각한가? 지식, 분쟁, 문화와 역사,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종교와 이념… 그 보다 소중한 우리들 본질적인 삶, 자신의 삶 속으로 좀 더 자유롭게 자존하며 즐겁게 뛰어들 수는 없을까? 한 평생 마르지 않는 샘물이 지상 천국에 틀림없이 마련되어 있을 터인데…  떨고 있는 자 울림을 마련하는 자 그는 이미 지상의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지인(至人)일 것이다.

아스투리아스 지방국기를 단 주택. (사진=박인기)

아스투리아스 지방국기는 푸른 바탕에 노란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집집마다 내걸어 놓고 있는 국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십자가 밑에 좌우로 알파와 오메가 상징글씨가 함께 새겨져 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신념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 같다. 그 오래된 미래의 지혜가 참 놀랍다.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살아와도 늘 한결같은 그들의 생활철학, 순례길의 의미가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사진=박인기)

걷는 길, 사는 길, 높고 낮은 산맥은 한결 같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걷다보면 틀림없이 앞산이 뒷산이 될 것이다. 

아~ 내가 좋아하는 3, 3의 숫자가 산골 마을 집주소를 알리는 번호판에 33 숫자로 적혀있다. 3은 무게 중심이 완벽한 균형의 숫자다. 그 3의 숫자를 3곱으로 또 반복 확장하니 그 헤아림의 깊이는 도를 닮았다.

(사진=박인기)

우리는 태극의 청(靑)과 적(赤) 어울림의 상징성은 잘 기억하면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황색의 작용 터전은 곧잘 잊는다. 터전은 대지요, 바다이며, 흐르는 강물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3의 구체적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육체적 결실이든, 정신적 이념이든... 그렇게 3의 결과물이 생명의 원리대로 인간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필자와 다른 순례객. (사진=박인기)

3은 이(夷), 희(希), 미(微), 변함없는 도체(道體)의 모습이다. 3, 3은 끊임없이 변하는 불변의 작용 도용(這用)을 상징한다. 그 3과 3이 모여 드러내는 삼삼의 모습은 우리 삶의 이상적 도상(道象)이 된다. 내 생일이 바로 삼월 삼짓날이다. 삼삼이 하나의 법칙이 되면 그것은 우리가 지켜 나아 가야 할 생명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 내가 특별히 3,3을 좋아하는 이유다.  

걸어가는 순례객들.(사진=박인기)

사실 내 박사 논문의 초안은 ‘노장철학과 생명디자인의 형상화’이다. 수년 전 학위논문청구 2차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의 집요한 논리적 ‘닦아 세움’에 내 생명이 휘청거려 일단 포기했었다. 스스로 더 느끼고 더 파며 더 이해하기 위해 더 덜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가(儒家)를 알아야 도가(道家)가 살아난다.

(사진=박인기)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산길 오솔길, 이렇게 걷다보면 노르테 까미노, 전체 거리의 3분의 2쯤에서 마감하는 최종 목적지 히혼(Gijon)에 내일이나 모레쯤 닿을 것이다. 거기서 오베이도로 이동하여 다시 펼쳐질 프리미티보(Primltivo) 원조길은 또 어떤 모습을 품고 있을까? 벌써 마음이 설렌다. 

해안가에 위치한 호스텔 마레하다(Hostel Marejada)에 여장을 풀었다. 바다를 바로 눈앞에 펼쳐 놓은 기분 좋은 호스텔이다. 아침 포함 20유로, 9시 체크아웃이다.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Nueva→Ribadesella/Ribeseya→Terenes→Playa de Vega→Colunga, Hostel Marejada 29.7㎞, 41,154걸음, 11시간 00분 (까미노 참고용 : Ribadesella/Ribeseya→Sebrayu 37.4㎞, 11시간30분)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