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8.27 05:00
(사진=박인기)

모두 떠난 텅 빈 알베르게, 새끼발가락의 갈라진 상처에 약을 바르고 8월 13일 오전 8시30분 길을 나섰다. 어제 걸음걸이가 많아 힘들었었다. 그래도 걸으면 또 좋아지겠지, 천천히 차근차근 끝까지...

(사진=박인기)

내 나이가 70, 지금까지 돌아가신 부모님의 아들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남편으로, 가장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5년 전 정년퇴임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보내고 난 지금, 왠지 내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일종의 갈망이다. 시작이 그랬었다. 먼 여행을 떠나자. 걷는 길, 사는 길, 꿈꾸는 마이 웨이, 먼 여행을 떠나 보자. 이유...?

(사진=박인기)

A long way for my life of joy. l thought Spain Camino is the most famous one over the world. That is why I am here walking. 1st step is Camino del Norte, and 2nd step’s Camino Primitivo because they have a lot of the beautiful seashore lines & stunning mountain ranges. So far, I feel heartly, life is beautiful too. Every step, every moment also l enjoy feeling happy & joyful. That’s why l am here. That is a kind of The Truth to me. That’s it!

(사진=박인기)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만국 공통으로 사용되는 노란색 화살표이다.

(사진=박인기)

또 하나는 순례길의 공식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는 노란 조개형태. 빛나는 별을 상징한 빛나는 그 조가비는 빛의 근원을 방향성으로 제시한다. 항상 근원을 따라 걸어가라는 묵언이다. 그 근원이 마이 웨이, 나의 삶, 나의 길이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길과 나의 삶이 바로 순례길이라는 은유를 까미노가 동서고금 이 길을 걷는 모든 이에게 오늘도 끊임없이 반복 수련시키고 있다. 

까미노와 알베르게를 가리키는 조가비.(사진=박인기)

그런데 오늘도 살아 걸어가고 있는 빛나는 내 삶의 근원은 어디를 향해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가? 둘로 갈라지는 길, 반대방향을 가리키는 두 개의 빛나는 조가비가 내게 묻고 있다. 거꾸로 위치한 무게중심의 조가비, 하나는 까미노 길, 또 하나는 달콤한 휴식을 권하는 알베르게 길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박인기)

그래, 과연 내 삶은 어떠한가? 나이 듦의 길, 아직도 걷고 있는 교육자의 길에서 혹시 지식, 경험, 권위를 앞세운, 이기적 무게중심의 길로 가고있는 건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면 내 삶의 길은 과연 어떠했는가?  

(사진=박인기)

돌이켜 보면 지금도 짊어진 25㎏의 배낭무게가 언제나 내 삶의 무게였다. 가난한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나 6.25 전쟁을 겪었고, 가족 중 위로 누나 한 분, 아래로 여동생 둘을 잃고 살아남은 네 가족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웠다. 보따리상처럼 수없이 옮겨다녀야 했던 달동네 셋방살이의 유년시절이 특히 지긋지긋했다. 당시에도 가난을 피하기 위해선 아들을 대학 보내야 하는 것은 필수,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들어가야만 했고, 군복무를 마치고 대기업에 취업, 결혼, 딸, 아들...그리고 교수 생활까지 끝낸 뒤 5년 전 정년퇴임했다. 

(사진=박인기)

그 사이 수 없이 오르고 내렸을 자갈길, 돌길, 막힌 길, 우회 길...때로 숲길 흙길도 있었지만 대체로 거칠고 힘든 길이었다.

(사진=박인기)

그 길을 70년 동안 산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나는 우직하게 걸어왔던 것 같다. 자식으로, 학생으로, 혹은 남편으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이제는 내려 놓아도 되겠건만...지금도 내려놓지 못하는 25㎏ 배낭 무게는 그렇게 짊어진 내 삶의 무게다.

(사진=박인기)

나는 무엇을 잘 하는가? 그림 그리는 것? 가르치는 것?  미술대학을 나왔고 교수생활도 했으니 잘할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 무엇을 그려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 둘은 사실 걷는 길 사는 길이 어떠냐고 묻는 것과도 같다. 걷는 길 사는 길이 같은 것 처럼 그 둘은 사실 동의 반복질문이다. 

(사진=박인기)

내가 걷는 길, 내가 사는 길은 등 뒤에서 보면 똑같은 그림이고 똑같은 교육이다. 따라서 불언지교(不言之敎), 말없이 내 길을 가야 한다. 사랑하는 모습으로, 검소한 모습으로, 그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렇게 친절하고 소박하게 내 그림을 그리자. 삶은 즐겁게 사랑하며, 친절하게 오래오래살아야 하니까...

해발 1,030m 고지를 향해 중력을 거스르며 오르는 거친 산길, 흐르는 계곡물은 노래하고 빛나는 조가비는 빙그레 미소짓고 있다.

(사진=박인기)

그렇다. 내가 걷는 모든 길이, 내가 사는 모든 길이 다 순례길이다. 친절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있고 검소가 있으며 겸손함이 보이는 모든 길이 다 즐거운 순례길이다. 

(사진=박인기)

Berducedo의 공립 알베르게는 공사 중이라 낭패다. 그리고 사설 알베르게 Albergue-Pension Casa Marques와  또 하나 알베르게 모두 이미 다 찬 상태다. 도착지마다 사설 알배르게는 이미 점령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살라스에서부터 함께 지내 친근했던 젊은 동행인들처럼 순발력 좋은 여행객들이 미리미리 예약하고 점령해버려 우직한 순례객들은 잘 곳이 마땅찮아진 것 같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사설 알베르게 주인이 비장의 카드를 제시한다. 30유로에 감춰둔 방을 쓰란다. 그렇게 하늘동네 까미노 프리미티보, 베르두세도(Berducedo)에도 이미 상술이 넘쳐나고 있다. 

(사진=박인기)

"미안합니다. 난 이미 카사 마케즈 알베르게 앞 공터에 텐트 칠 자리 보아 놓았어요." 

 햇살 좋은 해발 807m 고원지대 베르두세도에서 오랜만에 텐트를 쳤다.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Pola de Allande→Berducedo, Albergue Casa Marques 앞 텐트 18.2㎞, 29,915걸음, 6시간 20분 (까미노 참고용 : Pola de Allande→Berducedo→A Mesa 20.4㎞, 6시간00분)  200㎞ to Santiago!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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