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9.01 05:00
루카스와 필자. (사진=박인기)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Río De Janeiro)에서 온 사람과 이곳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까미노 길에서 배낭도 무겁게 보이는데 양손에 짐까지 들고 걷는다. 신발도 슬리퍼를 신고 꾸준히 걷는다. 복장도 남달라 눈에 띄었었는데 오늘 알베르게에서 그와 인사를 나눴다. 겉 모습이 참 많이 다른, 그 사람 역시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도 나처럼 이룬에서 38일째 걷고 있다고 한다. 태극에 관심 많고 댄스강습소를 운영한다는 그의 이름은 루카스(Lucas). 모두 떠난 자리 남겨놓은 음식을 다 먹더니 대신 여기저기 청소까지 깨끗히 해놓는다.

(사진=박인기)

빌바오에서 거리연주를 하고 있던 인디오청년도 그렇지만 루카스도 남미 브라질에서 왔다. 그들 나라와 역사적으로 깊은 상흔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정복자 스페인, 여기까지 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짐작되는 바도 있지만 시간의 떨림을 통해 성숙해졌을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다.

(사진=박인기)

오늘(8월 18일) 목적지 루고(Lugo)까지 약 30.5㎞ 걷고 나면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약 98㎞정도 된다. 돌이켜 보니 꽤 걸은 셈이다. 이룬에서 히혼까지 약 500㎞ 걷고 또 피리미티보 길을 약 200㎞ 더 걷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마드리드행 항공표 구입과 관련해 아들과 오랜만에 반가운 통화하느라 아침 이른 시간을 보내고 오전 9시 40분 천천히 알베르게를 나섰다. 롱 웨이, 갈 길이 멀어 모두 새벽에 떠난 지 한참 됐다.

(사진=박인기)

그런데 나가보니 밖에 비가 쏟아진다. 루스카가 천천히 가까운 카스트로베르디(Castroverde)로 함께 걷자고 붙든다. 2~3일 함께 걸으니 정이 들었는가 보다. ‘오케이~ 그리하지 뭐, 급할 것도 없는데...’ 하지만 두 시간만에 먼저 카스트로베르데에 도착해보니 마음이 변한다. 뒤에 올 루스카에게 미안하다고 편지 써 그곳 알베르게 문에 꽃아 놓고 원래 계획했던 루고(Lugo)로 향했다. 비는 오다말다 걷기에 딱 좋다.

네슬레와 필자. (사진=박인기)

도중에 바(Bar)에서 폴란드인 네슬레와 또 조우했다. 56살 네슬레, 인디아 2세인 그는 만날 때마다 편안함으로 울림을 주는 친구다. 이런저런 여행길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향후 계획이 있으면 여기가 좋다며 추천한다. 코스타리카 굿~! 이태리 굿~!

좀 전에는 60살 루카스 왈, 남미 콜롬비아, 칠레, 페루 굿~,  but 우루과이..?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 포르투에 가면 그곳에서 큰 성당에 있는 인포메이션센터부터 찾아 숙소 알베르게를 안내 받으라며 조언까지 해줬다. 

(사진=박인기)

순례길에서 보면 모든 게 순수하다. 좋은 사람도 많고 걷기 좋은 멋진 길도 많다. 그런데 순례길의 진정한 의미는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천천히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임이 분명하다. 옆 사람의 삶이 바로 나의 순례길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차근차근 검소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만나자. 

(사진=박인기)

오늘 길 또한 걷기 좋은 평지길, 게다가 푸릇푸릇 생명력까지 힘차게 떨고 있는 흙길 숲길이 주욱 펼쳐진다. 길을 가는데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산티아고에 갔다가 다시 오비에도를 향해 거꾸로 걷고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에서 피니시테라까지는 약 88㎞, 3일 걸릴 것이고 무시아도 아주 좋을 것이라고 또 친절을 나누어 준다. 그는 스페니쉬, 아마 스페인 자기 집까지 걸어 갈 작정이 분명해 보인다. 길 위에 사는 진정한 순례자이다.

숲길을 걸으며 한국인 자화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저께 폰사그라다까지 오는 도중에 바르에서 만났던 영어가 유창한 독일인 여자, 그리고 오늘 루고로 가다가 바르에서 다시 만났던 폴란드인 네슬레, 그들 모두 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나이도 들고 반갑게 다가서는 내가 전에 만났던 한국인들과 조금 달라서 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친근감으로 그들의 불편했던 속마음을 내게 털어 놓는다. 그들의 불쾌감을 풀이하면 대충 이렇다. 

(사진=박인기)

‘한국인들은 알베르게에서 혼자 구석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모여 마시고 떠들며 놀다가, 정작 길을 떠날 땐 가벼운 냅색 차림으로 경주하듯 서둘러 달려가 제일 먼저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해 점령해버라는 것, 그것이 불쾌했었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순례는 사람과 사람이 매 순간 만나는 교감과 예의에 관한 것인데 그 순례길 위에서 사람을 하나의 경쟁대상으로 보고 경쟁자를 따돌리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남울 의식해서 사는 사회, 경쟁해서 이겨야 살아가는 사회... 혹시 우리의 자화상이 이런 이기적인길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길을 가면서 자기 길을 만든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다 막혀 다시 돌아 나오는 길, 가시덤풀이 우거져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길 등... 뒷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혼자 달려가는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자기가 먹는 것, 만나는 것, 웃는 것, 사랑하는 것 모두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하나의 길이다. 순례길도 당연히 길이다. 그 길이 불쾌하면 한국인 모두가 불쾌해진다.

(사진=박인기)

난 항상 천천히 무거운 배낭을 짊어졌으니 제일 늦게 다음 목적지 알베르게에 도착하곤 한다. ‘텐트가 있어 걱정없으니까’ 라며 웃는 내 모습이 편해서일까? 혹은 며칠동안 함께 길을 걸어오면서 여러번 눈 여겨 봤을 내 모습에 비로소 한국에 사는 사람 하나를 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착각하며 속마음을 풀이하고 혼자 걷는 길, 스치는 바람에 씁쓸한 웃음을 실어 보낸다 .

너무 단단하고 지혜로운 한국인들, 너무 날렵하고 재능 많은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나 혹시 뭉치면 쉽게 부서져 버리는 모래알들은 아닐까? 순례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 단단한 건물을 지은 스페니쉬의 귀신같은 솜씨를 눈여겨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사진=박인기)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즐겨야 한다. 그러나 나이 든 부부, 젊은 커플, 홀로 걷는 이의 모습도 눈여겨 보고 그들의 즐거운 인생은 어떤 것일까?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만나면 사람의 떨림이 다가오고 걸으면 자연의 울림이 스며든다. 만나서 얘기하고 함께 웃으며 더불어 살고, 또 홀로 차근차근 숲속을 걸어보라는 것이 순례, 천년 순례의 깊은 가르침이다. 

홀로 걸어야 느끼는 자연의 떨림, 깊은 생명력의 환희, 그 떨림 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오늘도 걷는다. 천천히 걸으면 나 또한 길 위에 즐거운 떨림이 된다. 발가벗은 자 마음을 비운 자 비로소 떨 수가 있다.

(사진=박인기)
(사진=박인기)

벌거벗은 겸손함, 자세 낮춘 진실한 마음의 검소함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떨림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떨어야 사람의 인생, 더불어 울릴 수 있도록 떨어야 진정한 삶의 모습, 진정한 사랑이다. 진심이 만들어 놓은 천년 순례길은 하룻나절 소나기 예능길이 아니다. 폭우도 하룻나절 못 간다 했던가? 마른길 위로 하늘이 푸르게 터지고 있다.

(사진=박인기)

‘Follow your heart!’ 길 가 포시나데 뮤니즈(a pócina de Muñiz) 알베르게의 카페(café) 문구에 끌려 맛 본 ‘엠빠나다(Empanadas)’ 갈리시아 빵, 베리 굿~! 생선 다진 고기에 양파 등 채소를 속에 섞어 넣고 납작하게 눌러 만든 갈리시아 지방 전통 식빵이다.

오늘은 쏟아지는 빗 속 질척길, 오다말다 숲속길, 바람부는 싱그러운 마을길을 지나 푸르게 걷힌  마른 아스팔트 포장길을 홀로 즐겁게 걷는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100㎞ 지점을 넘으려면 아직도 더 12.487㎞, 오늘 총 30.5km 롱 웨이지만 즐겁기만 하다.

(사진=박인기)
(사진=박인기)

역시 또 땀방울길, 푸른 하늘이 온통 붕(鵬)새로 뒤덮였다. 6개월 날아가 6개월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노닐다 다시 땅으로 내려 온다는 붕새다. 지상 만물의 떨림을 위하여 1년 동안 변함없이 반복되는 생명의 계곡 강 바닷길... 그리고 시원하게 들이킬 한 잔의 맥주, 루고에 도착 후 들이킬 맥주는 아마도 1년 후 다시 내게 날아 온 붕새다, 물이다, 그리고 도(道)다.

드디어 루고에 들어서는 골목길, 주검 행렬이 둘 있다. 사이 공간 없이 빽빽하게 심어 결국 청년기 시절까지 버티다 모두 죽어 늘어선 소나무 행렬, 그리고 사람의 주검으로 만들어 놓은 공동묘지 무덤 행렬이 그것이다. 그 소나무들을 숨막히게 계획하여 심었을 죽은 자, 누워있는 그 무덤 앞 십자가에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상징적으로 조각해 걸어 놓은 수건이 참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계획적으로 잘 죽이느라 수고했다니... 죽어 서있는 소나무 행렬과 죽어 누워있는 무덤 행렬이 보란 듯 죽은 순서대로 참 묘하게 놓여있다. 아 인생길...순례길...

이제 근원을 향해 남은 거리 100㎞를 알리는 이정표지석 가까이 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성벽, 아마 루고 성벽이 그 경계인 것 같다. 중세 로마시대에 지었다는 루고 성벽문을 지나며 지난 36일 동안 감춰왔던 감회가 문뜩 새롭게 느껴졌다. 그간 걸어 온 길, 비 바람길, 흐린 구름길, 땀 흘리던 햇볕길 약 750㎞가 모두 인생길, 나의  순례길이었음을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진=박인기)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라. 시간은 저녁 8시20분을 넘겼다. 때마침 바삐 찾아가는 길에서 아침에 헤어졌던 방친구를 또 만났다. 살리메에서 부터 함께 걷고 세 번씩이나 같은 알베르게에 투숙했었고 두 번 같은 침대 위아래를 함께 쓰던 잘 생긴 스페인 음악선생을 또 루고에서 만난 것이다. 

저녁 약속 때문에 급히 밖으로 나가다가 나를 만나 손을 흔들고 시계를 보더니 머리를 흔든다. 잠시 이곳저곳 생각하더니 공립 알베르게로 나를 이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계획했던 Albergue de Peregrinos Lugo에 특별히 입성할 수 있었다. 참 고마운 까미노길 은인이다. 아쉽지만 같이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질 수밖에... 탱큐,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사진=박인기)

그리고 한 시간 후 배가 고파 바삐 저녁식사하러 나갔다. 여기저기 찾다가 들어간 식당, 거기서 또 프랑스 부부와 함께 식사하는 그를 만났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친절은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 것인가? 그의 친절이 그 뒤로도 끝이 없었음은 이하 생략하기로 하자. 

먼저 작별 인사하고 서둘러 밤 10시까지 알베르게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진정되지 않는 인생길, 진심 어린 울림 하루길을 깊이 음미하였다. 리오 데 자네이로 사람 루스카, 폴란드 사람 네슬레, 그리고 스페니쉬 아마데우...아~ 모두 놀라운 나의 은인들이다.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O Cadavo→Vilavade→Castroverde→Castroverde→Lugo 30.5㎞, 47,224걸음, 10시간 20분 (까미노 참고용 : O Cádavo→Vilavade→Castroverde→Castroverde→Lugo 30.5㎞)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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