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9.03 05:00
(사진=박인기)

텐트 속은 언제나 자유롭다. 8월 20일 오전 8시에 일어나 다행히 마른 텐트를 걷기 시작했다. 테레사 여사 덕분에 짧아진 거리, 멜리데까지 약 20여㎞ 큰 부담이 없다. 

사설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친절하지만 그 친절은 너무 기능적이다. 순례자들은 그 기능적 설정 테두리 안에서 행동해야지 조금이라도 선울 넘으면 작동을 멈춘다. 아침 9시20분, 물 얻으러 들어 갔더니 9시에 떠나야 하는데 왜 아직 안갔냐며 표정이 돌변한다. 그 표정, 어제 저녁 만찬에서는 한없이 상냥하고 싹싹하게 웃음 띤 스페니쉬한 그 얼굴이다. 설정대로 먹고 마시고 떠나야 하는데... 손익계산이 정확해야 하는 뛰어난 성능, 기능 좋은 사립 알베르게, 아 ~ 나베...

(사진=박인기)

사실 사설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편리한 대신 철저하게 예약제다. 공립 Municipal Albergue는 다소 불편하지만 여유롭고, 선착순이라 인간적이다. 내 생각에 텐트 안은 그보다 더 자유롭다. 9시 이후까지 내 뜻대로 있었으니 말이다.

Bar에서 인터넷 확인하다보니 어느덧 오전 11시, 38일차에 느긋하게 빈 길을 떠났다. 앞으로 남은 멜리데(melide), 페드로우조,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유위적 성능성은 또 어떻게 전개될까? 가만히 지켜보며 내 식대로 즐겨보자. 

스페인 청년과 기념촬영하는 필자. (사진=박인기)

스페니쉬 피터팬과 그의 가죽공예품 제작실에서 커피를 얻어 마셨다. 친절함 넘치는 청년 주인은 존 레논 닮은 예술가다. 남은 3일 동안은 더욱 천천히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걸 살피며 즐겨보자.

(사진=박인기)

마침 앞 집의 담벼락 나란히 세워놓은 개인용 기도실 같은 것이 눈길을 끈다. 양쪽 끝으로 십자가를 설치해 놓은 기도실은 지어 놓은 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벽면 나무결의 쇠락한 흔적만이 선조들의 남달랐었던 신앙심을 잠작케 한다. 그 깊은 기도 공덕이 늘 유쾌한 스페니쉬 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사진=박인기)

그리고 폐허가 된 조그만 동네교회는 이들 선조들이 주검으로 누워 있는 공동묘지이자 천국문를 지키는 성소가 됐다. 

‘맹자’에 나오는 한 귀절을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선(善)을 지극히 실천하면 믿음(信)이 되고, 그 믿음에 충실하니 비로소 아름답다(美)’ 그렇구나, 멜리데로 향하는 길, 햇볕 받아 빛나는 모든 게 놀랍도록 아름답다.

(사진=박인기)

프란체스카 이태리 로마대학 교수를 점심 카페에서 다시 만나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카페 주인과 대화하며 통역해주는 그의 설명울 통해서 내가 보았던 것이 기도실이 아니라 생활 공간, 즉 토마토,콩 채소류 등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오레오(Hórreo para el grano)라는 이름의 저장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참 잘못 나갔지만 조상의 지혜로운 공덕인 것은 맞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웃고 정리하자. 바람 많은 지역의 특성을 잘 이용해서 공기순환장치를 해결한 오래된 지혜로움이다.

시드니에 온 여성과 한 컷. (사진=박인기)

호주 시드니에서 왔다는, 다리가 불편해 쉬고 있는 젊은 여자를 만나 멜번에 살고 있는 딸내미 얘기도 하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의 설명에 따라 서둘러 걸어 온 한국 하동에서 왔다는 박 선생님도 만났다. 참 오랜만에 우리 말을 자유롭게 쓰며 유쾌한 시간을 갖었다. 독일인 친구도 함께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고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돠었다.

(사진=박인기)

저녁시간엔 ‘뿔페리아 이제쿠엘(Pulperia EZEQUIEL)’,멜리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문어요리집에 둘러 헤어졌던 이태리 커플을 또다시 만나 요리주문 도움도 받았다. 이태리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함께 모여 끼리끼리 웃고 떠들며 유쾌,상쾌, 항상 즐겁다. 기본만 지키면 그것도 하나의 문화이니 보는 사람도 흥겹다.

(사진=박인기)

이곳 멜리데는 프린세스 순례객과 프리미티보 순례객들이 만나는 곳, 그런데 프린세스 순례객들이 주류를 이룬 듯 낯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진=박인기)

‘뿔뽀(Pulpo)’ 문어 요리 한 접시 9.5유로, ‘감바스 알 아지요(Gambas al ajillo)’ 새우요리 한 그릇 10유로, 맥주 한 병, 화이트 와인 및 레드 와인 한 잔씩 ...즐거운 저녁시간이었다. 

(사진=박인기)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Ferreira, Albergue A Nave→Melide, Alfonso ll 21.1㎞, 31,433걸음, 7시간 10분 (까미노 참고용 : Ferreira→Melide 20.01㎞)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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