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원성훈 기자
  • 입력 2019.09.21 08:35
원성훈 기자.
원성훈 기자.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프랑스 시민 혁명의 산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9조에는 "누구든지 범죄인으로 선고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고 씌여져 있다. 이른바 '무죄 추정의 원칙'이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당연한 상식으로 굳혀져 있는 이 원칙이 예전에는 전혀 '상식'이 아니었음에 주목한다.

우리나라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렷다"면서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는 등 자백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고문이 행해지고, 혐의를 받는 사람이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유죄로 처벌됐던 야만적 제도가 사라진지는 불과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재판권을 군주로부터 빼앗아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재판관에게 부여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을 금지시키며, 형사 재판에는 자백보다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등의 원칙을 확립하기까지 인류는 오랫동안 투쟁해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무죄추정의 원칙'이 사람에 따라 철저히 보장되기도 하고, 완전히 무시되거나 아예 보장되지 않기도 한다는 점이다. 역사·사회적으로 피와 땀으로 일궈내고 확립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은 민주주의 대원칙에 전면으로 반하는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일선 경찰서 현장에서 잡범들을 잡아 임의동행한뒤 불편한 철제 의자에 장시간 앉혀 놓고 변호사도 입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범죄자'로 확정된 듯이 취조하는 경우가 없지않다. 이런 경찰을 지휘한다는 검찰도 구부러진 잣대를 가진 듯 하다. 검찰 스스로 명백한 '범죄 피의자'로 규정한 조국 법무부장관 부부로부터 중요한 핵심 증거물이 될 수 있는 휴대폰을 아직까지도 압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조국 법무부장관 부부가 아닌 일반 범죄 피의자였어도 검찰이 이런 태도를 보였을지에 강한 의구심이 든다.

범죄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하기에 앞서 당연히 휴대폰부터 압수하고 필요하다면 포렌식까지 해서, 혹여라도 인멸한 증거가 없는지 들여다 보는 게 수사의 기초다. 이런 점에서 조국 법무부장관 부부에 대한 검찰의 최근 태도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행태 자체가 국민들의 눈에는 '특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한,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받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칙'이라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하고 그 과정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원칙이라면 그것은 원칙일 수가 없다. 이 과정에서 공정·정의·평등이라는 가치가 훼손되어 지는 것은 물론이다. 오히려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층을 구분하는 또 다른 신분제를 실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제대로 살아있다면,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고유정과 '드루킹 관련 댓글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대우에 단 한치도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원칙이 있더라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유정에게는 '얼굴을 공개하는 게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쏟아지면서 마치 '유죄'로 이미 확정된 것처럼 욕을 해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는 그가 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원 앞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입장문을 낭독할 시간을 주는가 하면, 지지자들에게서 장미꽃을 받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의 각종 '특전'을 베풀었다.

한명숙 전 총리가 감옥으로 들어가던 지난 2015년 8월 24일 한 전 총리는 이른바 '백합 퍼포먼스'를 벌였다. 마치 '나는 무죄인데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뉘앙스마저 풍기게 하는 퍼포먼스였다. 당시 한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으로 시작된 정치보복 나에게서 끝나길..."이라며 "당당하고 떳떳하게 싸워서 반드시 진실을 밝혀 내겠다"고 일갈했다.

이렇게 보무도 당당했던 한 전 총리였지만, 2013년 진행된 2심에서 유죄로 판결받아 징역 2년, 추징금 8억 8천 3백만 원을 선고받았고, 2015년 3심에서도 2심 결과를 뒤집지 못한 채 유죄로 판결받아 2심과 같은 형량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한 것이다. 결국, 2017년 8월 23일 징역 2년 형기를 마치고 만기출소했지만, 당시 12년간 피선거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1944년생인 한 전 총리는 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 같은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그간 '무죄추정의 원칙'이 사람에 따라 달라진 경우는 적지않다. 오히려 최근들어 시계는 거꾸로 가는듯 하다. 김경수 경남지사에게는 수갑을 안 채운 채 호송하고, 유튜버인 변희재 씨에게는 수갑을 채우는 등의 분명한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한 전 총리의 법원 앞 퍼포먼스는 차라리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로서 실질적으로 기능하려면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돼선 안 될 것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이어 '유권무죄 무권유죄'마저 믿지 않도록 상세한 부분까지 규정을 마련하는 제도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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