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진혁 기자
  • 입력 2019.10.06 06:10

화장품 '박가분'으로 일어나 오비맥주·코카콜라·KFC·버거킹 등 소비재 주력
'승승장구' 경공업…'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겪고 중공업으로 '턴어라운드'

(사진제공=두산)
두산그룹의 모체인 '박승직 상점'. (사진제공=두산)

[뉴스웍스=장진혁 기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치열한 경쟁을 견뎌내고 버틴 자에게는 그만한 비결이 있다는 뜻이다.

두산은 올해로 12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最古)의 기업이다. 1896년 배오개(현재 서울 종로 4가)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상점인 '박승직 상점'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뒤로 오래된 기업에는 1897년에 설립된 신한은행·동화약품이 있다.

두산은 주력 사업을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중공업'에서 '연료전지·전지박·협동로봇 등 신사업'으로 끊임없이 전환해왔다.

두산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맥주·식음료·생활문화사업 등 경공업 위주였지만,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으로 인한 '존망의 기로'에서 산업시설·건설기계·에너지·생산설비까지 아우르는 중공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했다.

'위기'를 '변화'의 발판으로 삼은 두산은 2000년 3조400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8조200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뤄낸다.

두산은 이에 멈추지 않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대내외 경쟁력을 갖춰 나가기 위해 '디지털 전환'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통적 제조업인 발전소 플랜트와 건설기계 등에 ICT(정보통신기술)를 접목해 사업영역을 넓혀감과 동시에, 전사적인 디지털 전환 작업을 통해 새로운 미래 제조업의 길을 열어 나가려는 것이다.

또한 두산은 연료전지와 소재 사업을 각각 분할해 별도 법인으로 출범하며, 빠른 성장이 예상되는 신사업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할 계획이다.

◆오비맥주를 주력으로 한 소비재 사업의 '성장'

두산의 역사는 1896년 매헌(梅軒) 박승직 창업주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896년 8월 1일 배오개에 두산의 모체인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이 곳은 포목업을 주로 했다.

주요 단골들에게 사은품으로 화장품을 제공했는데 반응이 좋자 1916년 공장을 만들어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을 생산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를 바탕으로 1925년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대한민국 최초 근대 기업으로 면모를 갖춰 나간다.

1936년 박승직 창업주는 아들인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에게 경영을 물려준다. 박승직이 두산의 초석을 놓았다면 연강(蓮崗) 박두병은 지금의 두산그룹을 만든 장본인이다.

박두병은 광복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를 인수해 동양맥주(오비맥주 전신)를 설립함으로써 현대적 경영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해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다.

특히, 두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오비맥주로 대변되는 소비재 중심의 사업구조로 돼 있었다.

건설이나 기계를 담당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그 뿌리는 결국 오비맥주다. 동산토건(두산건설)은 맥주공장 개보수와 상·하수 시설관리를 하던 동양맥주 영선과가 그 시작이고, 윤한공업사(두산기계)는 제조시설 수리를 맡던 오비맥주 공무과가 독립해 나온 회사다.

오비맥주는 오비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엄청난 성장을 한다.

매년 이익이 100% 이상 증가했으며, 영업부 직원들은 주문 폭주에 주문받기를 기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인기로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공식 맥주로 선정된다. 오비맥주는 6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며 줄곧 선두를 굳건히 지킨다.

두산은 오비맥주의 성공에 힘입어 음료(코카콜라), 식품(KFC·버거킹), 의류(폴로) 등 여러 소비재를 주력으로 했으며 유가공사업(두산유업)과 즉석김치(두산종합식품)까지 손댄 적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해외 프랜차이즈 기업을 통해 큰 돈을 버는 것에 주목, '매판자본(買辦資本)'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기업 존망의 기로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1990년대 두산이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91년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원액 30톤이 파손된 파이프를 통해 낙동강으로 유입됐고, 담당자들이 사고사실을 은폐하는 바람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사고로 대구지방 환경청 공무원 7명과 두산전자 관계자 6명 등 13명이 구속되고, 관계 공무원 11명이 징계 조치되는 등 환경사고로는 유례없는 문책인사가 뒤따랐다.

국회에서는 진상 조사위원회가 열렸고, 각 시민 단체는 수돗물 페놀 오염대책 시민단체 협의회를 결성했다. 두산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기도 했다.

가까스로 사태가 수습됐지만 같은 사건이 한 달 뒤 또 터졌다. 페놀탱크 송출 파이프의 이음새 부분이 파열돼 페놀원액 2톤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2차 사고가 일어남으로써 국민들의 항의 시위가 확대됐다.

결국 박용곤 회장(박두병 회장의 아들이자 두산그룹 3대 회장)이 물러나고, 환경처 장·차관이 인책·경질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

경쟁사인 조선맥주(하이트진로)는 두산의 아킬레스건인 '물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맥주를 끓여서 드시겠습니까?'라는 자극적인 광고문구를 대대적으로 내세웠다. '사람이 마시는 맥주를 만드는 자들이 강물에 화학물질을 방류하는 짓을 저질렀다'는 여론의 비판이 거셌다.

주력사업이었던 오비맥주의 시장점유율은 뚝 떨어졌다. 그 결과 1995년 그룹 적자규모는 9080억원, 부채비율은 625% 달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으로 인한 위기는 곧 '변화'를 위한 기회였다.

창립 100주년을 1년 앞뒀던 1995년, 두산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에 착수한다.

두산은 주력 사업이었던 오비맥주를 포함해 주요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하고 23개 계열사를 ㈜두산, 두산건설, 두산포장, 오리콤 등 4개로 통합한다. 돈이 되는 해외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IMF 외환위기 전이라 비싼 값에 팔렸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신의 한수'라고 평가한다. 국내 기업들에 'IMF 한파'가 몰아닥치기 전에 이미 구조조정에 착수한 것으로 한보, 삼미, 진로, 기아 등 숱한 기업이 쓰러져갈 때 두산은 재무 상태를 착실히 개선해 나갈 수 있었다.

일련의 구조조정을 통해 건전해진 재무 구조와 대폭 개선된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두산은 새로운 엔진 발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최고(最古)기업, 두산㊦]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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