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문병도 기자
  • 입력 2019.11.19 15:14

채연석 UST 교수, 역사서 속 '진천뢰' 개별 존재 기록 찾아내

[뉴스웍스=문병도 기자] “1592년(선조 25년) 9월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이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는데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명이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선조수정실록)

경상좌병사 박진(?~1597)이 비격진천뢰를 써서 경주성을 탈환했다는 실록기사다.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보다 폭발력이 훨씬 큰 '진천뢰'(震天雷)가 조선의 비밀 무기로 왜군을 토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초빙교수는 19일 "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사용된 폭탄인 '진천뢰'는 비격진천뢰보다 5배 이상의 살상력을 갖춘 대형폭탄으로 왜군을 토벌·격퇴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 첨단 무기였다"라고 주장했다.

채 교수는 신기전과 거북선, 각종 화포 등을 연구 복원한 고화기전문가로, 진천뢰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전북 고창읍에서 개최된 '비격진천뢰 보존 및 활용사업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진천뢰를 비격진천뢰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채 교수는 역사서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한 기록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1635년 편찬된 화약 무기 전문서인 '화포식언해'에는 '진천뢰는 대완구로 발사했고, 비격진천뢰는 중완구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의병대장 김해가 쓴 향병일기에도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으로 진천뢰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고 나와 있다.

채연석 교수는 "1694년 펴낸 강화도 지리서 '강도지'에도 비격진천뢰와 원 진천뢰가 따로 표기돼 있고, 1797년 '일성록'에도 수원에서 새로 만든 군기에 수철로 만든 진천뢰를 비격진천뢰와 구분해서 기록했다"고 강조했다.

채 교수는 화포식언해를 바탕으로 진천뢰의 지름이 33㎝, 폭발력은 비격진천뢰의 5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화포식언해에 따르면 '진천뢰의 무게는 117근 2냥(70.2㎏), 화약은 5근(3㎏) 능철(마름쇠)은 30개를 넣는다'는 설명이 나온다.

무게가 20근(12㎏)에 달하는 비격진천뢰가 화약 1근을 넣도록 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폭발력이 최대 5배에 달하는 셈이다.

채 교수는 진천뢰를 쏘아 올린 대완구가 세종대왕 때 개발됐던 총통완구와 크기가 같았다는 점을 고려해 대완구 설계안도 제작했다.

채 교수는 "비격진천뢰 유물은 많이 발견됐지만, 진천뢰나 진천뢰를 발사한 대완구 유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라며 "역사 속 기록물을 토대로 조선이 독자 개발한 진천뢰의 성능을 확인한 첫 연구"라고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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