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지훈 기자
  • 입력 2019.12.06 11:42

[뉴스웍스=박지훈 기자] "'국책은행' 타이틀이라는 방패를 가지고도 '시중은행'이라는 무기를 얻고 싶은 것이죠.".

한 지방은행 관계자가 정부의 기업은행장 관료인선설에 대한 기업은행 측의 관치(官治) 주장을 이같이 평가했다.

김도진 기업은행장이 오는 12월 말 임기를 마치면서 최대주주(기획재정부 약 53% 보유)인 정부가 후임 은행장 자리에 기재부 출신을 내려 보낼지, 기업은행 임원 중에서 끌어 올릴지 금융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기업은행장은 장관급인 금융위원장이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당연히 은행에서는 관료 출신 행장보다 내부 출신 발탁을 희망하고 있다. 이미 김 행장 등 내부에서 승진한 행장 3명이 좋은 실적을 기록해온 만큼 이 같은 관행을 이어가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은행장 역할이 사실상 시중은행장과 같아진만큼 외부 인사 임명은 부적절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4대 금융지주·은행과 디지털, 글로벌 경쟁을 펼쳐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데 관료를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좀 더 따져보자.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정책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책은행'이다. 행장 인선 이슈를 계기로 자신을 시중은행처럼 봐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정작 정책금융 부문에서 부족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웍스가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한 '금융기관별 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보증 공급현황' 자료에 따르면 5개 은행(우리·KB국민·신한·IBK기업·NH농협)의 지난 5개월간(5월 27일~10월 31일) 중소기업 청년 전세대출 보증 공급금액은 2조765억원이었다. 이중 우리은행은 6358억원을 공급하며 1위를 기록했고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의 경우 6060억원, 4163억원으로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은 2631억원을 공급하는 데 그쳐 우리은행과 국민은행 실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농협은행(1553억원)이 워낙 부진해 꼴등은 면할 수 있었다.

기업은행 영업점에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청년에게 보수적인 전세대출 전략을 유지했으니 실적이 나쁜 것도 당연하다.

뉴스웍스 취재에 따르면 ('구해줘 전세' 기획 참고) 기업은행 영업점은 전세물건지의 등기부등본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대출 한도 조회를 거절했다. 임대차계약서가 없이는 대출한도 조회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거래고객이 아니므로 대출을 취급할 수 없다고 했다.

기획기사가 보도된 이후 자성 노력은 커녕 대응조차 없었다. 기업은행은 '구해줘 전세'를 통해 문제점이 지적된 다른 은행들과 달리 어떤 해명이나 후속조치도 하지 않았다. A은행은 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창구 상담 프로세스 개선을 주문했고, 다른 B은행은 상담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를 인정했다. C은행은 오히려 자사 직원을 적극 변호하기도 했다. 기업은행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정부가 주인인 만큼 중소언론사의 지적에는 개의치 않는 모양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은 규제산업에 속하고 대외신인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민간은행들은 언론보도에 기만하게 대응한다"면서 "기획재정부가 지분 50% 이상 보유한 기업은행은 타행 움직임에 비하면 천하태평"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실제로 기업은행의 52주 최저가는 최고가 대비 75% 수준이었으나 우리금융지주의 경우 69%였다"면서 "기업은행 주가가 더 안정적인 것은 오로지 정부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기업은행은 여전히 자금조달 면에서 정부와 국민에게 도움을 얻고 있다. 유불리를 따져 어떤 때에는 국책은행, 또 다른 때에는 시중은행이란 타이틀을 내세우는 것은 비겁하다. 여전히 창구 행태는 국책은행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 관련 정책이 제대로 먹혀들 턱도 없다.

차기 행장이 '기재부 출신'일지, '내부 출신'일지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 정책금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일지를 꼼꼼히 살펴볼 때다. 중소기업 재직 청년은 오히려 '국민 눈치라도 보는' 관료 출신을 더 선호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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