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다윗 기자
  • 입력 2019.12.10 09:43

베트남서 건강 악화로 작년 귀국…"GYBM 교육사업 체계화해줄 것" 유지 남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향년 83세로 지난 9일 영면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때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이자 세계경영 신화의 주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한 인물로 전락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보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에서 출발한 창업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만 30세에 창업해 매출 71조원의 재계 2위로 키운 진취적인 기업이라는 점에서 돋보인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외환위기 직후 대우그룹 부실경영으로 사법처리까지 받는 등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 출생으로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 학교인 경기중과 경기고를 나왔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실업은 창립 첫 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이후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 대우개발로 이름을 바꾼 뒤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80년대 인수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45세 때인 1981년에는 대우그룹 회장에 올라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성장시키는 발군의 경영력을 발휘했다.

1990년대에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며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룹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 시점이다. 그 결과 대우는 1998년말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다.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대마불사’의 신화는 외환위기라는 암초를 만나게 된다.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이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해외에 머물다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그 결과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건강이 악화로 귀국해 치료를 받아왔다.

대우 관계자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로 남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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