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19.12.17 07:20

김태기의 경제클리닉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취약…대담한 중산층 강화 정책 나와야”

김태기 단국대 교수
김태기 단국대 교수

포퓰리즘, 즉 대중 인기 영합주의가 우리나라에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포퓰리즘은 과거에는 남미 등 개도국에 유행해 독재와 저개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지목되었는데 지금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도 포퓰리즘이 설치면서 공용어처럼 되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자리가 없어진 중산층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고 미·중 분쟁을 키워 세계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고, 유럽의 평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이민 규제 강화나 브렉시트도 중산층 표를 잡기 위한 포퓰리즘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기술혁신과 세계화로 중산층이 감소하고 소득 불평등이 커지면서 그 불만이 포퓰리즘으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취약하다. 포퓰리즘은 라틴어(populus)의 어원처럼 사람(people)을 앞세운다. 대중과 엘리트를 이분법적 대립 관계로 부각하고 엘리트는 부패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집단으로 매도한다. 엘리트의 전문성이 폄하되고 정치와 정책의 책무성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앞서 다룬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토지공개념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뿐 아니라 포퓰리즘은 기존의 정당이 공격받고 신생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문 정권처럼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며 재량권을 마구 휘두르고, 대중은 직접민주주의라며 언론과 사법부를 공격하고 법치주의를 흔든다.

세계 경제 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추락시킨 장본인으로 후안 페론 대통령이 손꼽힌다. 남미의 포퓰리즘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급격한 임금인상과 무상복지확대 등으로 노동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집권한 문 대통령이 보인 정책과 비슷하다.

포퓰리즘은 정치뿐 아니라 외교·안보와 경제·사회 등 나라 전체를 흔든다. 포퓰리즘이 좌파 이념이면 남미와 문 정권처럼 민족주의와 공공지출 확대를, 반면 우파라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이민 억제와 감세를 향한다. 어떤 이념이든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고 감성적 정책으로 유권자를 끌어넣는 공통점이 있다.

거의 모든 포퓰리즘은 특정 집단에 이익이 되어도 나라 전체에 피해를 준다. 유권자가 정책의 결정 과정과 결과에 대해 정보가 부족하면 포퓰리즘 정책을 합리적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문 정권의 국책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검토 면제처럼 정책에 대한 검증을 생략하고 결과에 대한 책무성까지 외면한다.

더 큰 문제는 문 정권이 그렇듯 법치주의가 흔들리고 선심성 정책이 판치면서 정치 불안이 커진다. 정치 불안은 예외 없이 기업과 개인의 물적 자본투자와 인적자본 투자를 해치고, 생산성 감소와 성장률 저하로 이어져 포퓰리즘의 직·간접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오래간다.

그렇다고 포퓰리즘을 무조건 비난할 수만도 없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수렁에서 미국을 살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한국을 빈곤의 덫에서 건지고 고도성장에 성공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수정자본주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형 자본주의’로 둘 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가미했다. 정치 포퓰리즘의 극치인 공산주의 위협을 경제 포퓰리즘으로 막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 정권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남미의 좌파 포퓰리즘에 기울어 소득주도성장을 뉴딜정책에 비교하고 민족주의를 팔아 망해가는 북한체제를 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임기의 어린이세대는 커서 중산층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세대는 산업화를, 그들의 자녀세대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소비와 투자가 늘고 경제성장이 촉진되며 자유가 확대되는 선순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도 중산층의 감소가 포퓰리즘을 일으키고 있다. 기술혁신과 세계화로 중산층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불안감 때문에 실제로는 중산층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인식하게 되고, 사회관계통신망(SNS)의 발달은 양자의 괴리를 더 키운다. 경제적 문제에서 출발한 포퓰리즘이 심리적 문제나 정보 왜곡 문제와 겹쳐져 더 꼬이게 된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 정권이 그렇다. 문 정권은 ‘사람중심경제’를 내세우나 사람을 빙자한 포퓰리즘 선언이다. ‘촛불혁명’ 동지인 민주노총의 영향력에 놓인 언론을 이용해 포퓰리즘의 칼도 휘두른다. 소득 불평등을 과장하고 원인을 대기업의 적폐로 몰았으나 결과는 ‘노조중심경제’였다. 집회시위가 2018년에 6만8005건으로 전년 대비 60% 증가했고 노동문제는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소득이 감소한 사람,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이 늘었다.

그래도 문 정권은 지금까지는 못했던 일을 자기가 해냈다고 선전한다. 이들의 허구를 실망한 대중에게 알리고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포퓰리즘은 잠재우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포퓰리즘의 출발이 중산층의 불만에 있으나 다른 나라와 달리 정책은 반(反)중산층이다. 바로 여기에 허점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이 그렇듯 중산층은 좌파 처방으로 자신의 삶과 자녀의 미래가 좋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득재분배로 받는 복지보다 자기 힘으로 소득을 늘리는데 관심이 더 크다. 포퓰리즘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대중에 다가서서 실상을 알리고, 포퓰리즘에 눌린 정당은 대중과 정서적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의 좌파 포퓰리즘은 허점이 많으나 우파 엘리트와 정당은 중산층 강화의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중산층을 강화할 수 있는 대담한 정책이 나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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