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3.10 17:06
1958년 사회주의 중국에서 벌어진 '대약진운동'으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진상은 아직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를 추적한 <묘비>는 중국 언론의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 금서로 취급하고 있다.

<묘비(墓碑)>라는 책이 있다. 중국에서는 금서(禁書)다. 1958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중국에서 벌어졌던 ‘대약진운동’을 적은 책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벌인 대약진운동으로 무수한 인명의 피해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웬만한 중국 지식인은 다 안다. 그러나 그 피해의 실상은?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개를 돌린다.

<묘비>는 그 내용을 다룬 책이다. 책이 적시하는 숫자는 매우 놀랍다. 과격한 혁명주의와 민족주의적 발상이 낳은 대약진운동의 결과 굶어 죽거나, 적어도 이 운동의 여파로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은 사람은 360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작자는 양지성(楊繼繩)이다. 전직 신화사(新華社) 기자로서, 현재 75세의 고령이다. 책을 펴낸 지는 매우 오래다. 그러나 일찌감치 이 책은 금서로 낙인 찍혔다. 중국에서는 공식 발매와 유통이 불가능하다. 홍콩에서 출판한 뒤 중국 민간에 흘러들어 이제는 중국에서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나 받아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에게 최근 미국의 니만 펠로우십이 2016년 뉴스 부문 정의상을 수여키로 했다. 그에게 수상 결정을 통보하고 미국에 초청까지 했다. 그러나 양지성은 출국금지 처분으로 미국에 갈 수 없다. 대신 그는 수상 소감문을 NYT에 기고했다.

중국의 뉴스 보도 상황이 어떤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에서의 엄혹함 그 자체다. 보도의 자유는 공산당이 허락한 상당히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환경에서 활동하며 마침내 <묘비>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 양지성의 소감은 어떨까.

그는 공산당의 내부 자료와 각 지방의 기록,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을 아주 오래, 면밀하게 추적했다. 공산당마저 은폐에 급급했던 각종 기록과 증언들을 따라다니며 ‘실상(實相)’을 잡아낸 중국의 이 ‘진정한 기자’에게 언론의 기자는 어떤 존재일까. 그가 NYT 기고문에서 기자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 여기에 소개한다.

 

비천한 직업이다. 이 직업은 옳고 그름을 뒤섞을 수 있고, 흑백을 뒤엎을 수 있다. 세상 가득 채우는 거짓을 만들기도 하며 억만의 독자를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숭고한 직업이다. 이 직업은 시대의 폐단을 바로잡으며, 암흑을 까발리며, 사악함을 두들겨 패며, 국민들을 위해 목숨을 걸며, 사회의 양심이라는 중책을 어깨에 걸머진다.

평범한 직업이다. 모순을 회피하며, 시비를 뭉갤 수 있으며, 능히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으며, 권세를 지닌 사람의 목구멍과 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신성한 직업이기도 하다. 세상을 가슴에 품고(胸懷天下), 장구한 역사를 생각하며(思慮千載), 당대의 정치를 비평하며, 정부를 감독하며,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매체가 입법과 사법 및 행정과 더불어 제4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끔 만든다.

천박한 직업이다. 그럴 듯한 기사를 적으면서 얼마간의 학식도 필요 없다. 탁월한 견해는 더구나 불필요하다. 말 잘 듣고 따르면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행세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직업이다. 전문학자가 아니지만,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사회를 연구하고, 사회의 문제를 컨트롤해야 한다. 얼마나 대단한 학식이 있으며 얼마나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복잡다단한 사회의 문제 앞에서 제가 얼마나 배움이 부족한지 물을 뿐이다.

편한 직업이다. 궁궐의 높은 누각에 드나들며 권력의 핵심을 오가며, 울긋불긋한 술자리의 자락에 머물며, 편안한 이벤트 자리에 드나들며 높은 사람 만나고, 중요한 사람 찾아다닌다.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사람 만나며, 봄바람에 잔뜩 취해 내 모습에 잔뜩 취한다. 내가 쓰는 글로써 보답만 잘 한다면 오늘의 서생(書生)은 내일의 고관(高官)이리라. 오늘의 고달픔은 내일의 부귀(富貴)리라. 그러나 위험한 직업이다. 총탄이 빗발처럼 오가는 종군기자는 접어두자. 평화로운 시절에도 고민하고 파고들며, 진상을 캐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하느니. 나를 막는 이 여럿이고, 게다가 포악한 이 없애려면 어려움과 위험이 천만의 겹겹이다. 권세가 있는 사람의 아픈 곳 건드리면, 생각지 못한 화근은 하늘에서 떨어지리니.

비천하면서 숭고하고, 평범하면서도 신성하다. 천박한 듯하지만 높고 깊으니 이는 다 사람의 옳은 지식, 인격과 가치가 가르는 영역이다. 진정한 직업적 기자는 숭고함과 신성함, 높고 깊음, 어렵고 위험함을 스스로 고를 것이다. 아울러 비천함과 평범함, 천박함, 편안함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천함과 숭고함, 평범함과 신성함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없고, 높은 담벼락이 없으리니 흑백의 길은 스스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은 길로 들어서면 역사의 치욕이라는 기둥에 제 몸을 묶어야 하니, 제 스스로 적은 명확한 기록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증거일지라. “비천함은 비천한 사람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의 묘비명(墓碑銘)”일 것이다. 이 변치 않는 규칙에 따라 비천한 길에 제 몸을 들이지 않으려면 두려움 없이 제 몸을 바쳐야 하리라.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대한민국의 환경이다. 그 속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행하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그런 한국의 기자들이 되새겨볼 만한 글이다. 우리는 ‘진상’을 제대로 적고 있는가. 우리 앞에 놓인 장벽과 구덩이는 얼마나 높고 깊은가. 우리는 그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를 새겨볼 만하다는 얘기다.

“비천함은 비천한 사람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의 묘비명.” 현대 중국의 언론 자유 환경은 비록 열악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려는 기자로서 양지성이 드러내는 의식의 저변(底邊)은 경건하기 짝이 없다. 중국은 이런 사람을 통해 역사적으로 한 걸음 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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