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문병도 기자
  • 입력 2019.12.28 08:33

[뉴스웍스=문병도 기자] 국민연금이 독단경영과 위법행위로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27일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절차 등을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지침에서는 횡령·배임·사익편취 등으로 기업가치가 추락했는데도 개선 의지가 없는 투자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이사 해임, 정관 변경 등의 주주 제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주주 권리를 침해한 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사 선임 등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를 들어 횡령·배임·사익편취 혐의로 사법 절차를 밟고 있는 효성과 대림그룹에 대해 정관 변경 주주 제안이나 독립적 사외이사 추천이 가능하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불공정한 합병 비율이나 뇌물로 기금에 손해를 끼친 삼성물산, 삼성중공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주주대표소송 등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지분 분포로는 ‘황제경영’에 제동을 걸 만한 실효성까지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주요 상장사에 대한 지분은 많아야 10%대로, 특수관계인 지분을 합친 ‘내부 지분율’이 평균 60% 가까이 되는 재벌과의 표 대결에서 이기기는 어렵다.

국민연금이 올해(1~9월) 투자한 회사의 이사회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해 부결시킨 비율은 1.9%에 그쳤다.

이번 지침은 주주 제안 요건에 모호한 단서 조항이 달려 있어 원안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침 제18조를 보면 ‘해당 기업의 산업적 특성과 기업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주 제안을 하지 않거나 연기할 수 있게 했다. 단서는 주주 활동 대상을 선정할 때부터 적용된다.

재벌 총수가 위법행위를 저질렀어도,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이 회사에 부품·장비를 공급하는 업체들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주주 제안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기금운용위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가이드라인은 국민연금을 더욱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며 "국민연금이 불가피하게 주주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도 자의적으로 결정하지 않도록 원칙과 기준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주활동에 대한 시장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산업적 특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금위 산하 전문위원회에서 고려하기로 해 향후 논란의 불씨를 안팎에 남겨둔 셈이 됐다.

이날 회의에는 지침의 목적이 ‘기업 길들이기’에 있다며 반발한 일부 사용자단체 대표들이 불참했다. 기금위 의결은 위원들 간 합의가 아닌 표결 방식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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