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15 14:34
학업은 나름대로 노동성을 지녔다. 적성에 맞는 다양한 학습으로 학생들의 창의성을 북돋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학생들의 등교를 9시로 하자는 의견에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했다. 자기들은 9시에 출근하면서 애들에게는 7시30분까지 학교에 가란다. 자기들은 6시 퇴근하면서 애들에게는 야간 자율학습하고 학원까지 들르란다. 앉아서 공부만 하는데 뭐가 힘드냐고 한다. 공부가 노동임을 인정하기 않기에 생기는 무자비한 어른의 ‘청소년 강제노동 현상’이다.

교육문제가 나오면 방송에서는 선진국 학생들의 즐거운 얼굴과 우리 자녀들의 찌든 모습을 내보낸다. 이는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보약을 못 먹어서 졌다는 해설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방송은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장점’과 선진국 따라 하기의 새 치마 바람을 만든다는 ‘단점’만 갖는다.

누가 뭘 하는지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니 먼저 학생이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대답이야 뻔하다. 아마 ‘공부(工夫)’라 생각할 것이다. 이런 오해 때문에 학생은 더 힘들다. 정확히 말해 학생은 학교라는 공장 노동자다. 학업이 노동이기에 공부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의 대문에는 그럴듯하게 “학문을 도야하고 심신을 연마하여 전인적 인간”을 만든다고 쓰여 있다.

직장인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수업하고 토, 일은 휴무다. 학교와 일반 직장인의 작업 시간대가 같다. 학교 수업 역시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정해진 업무다. 매일 숙제를 제출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 작업성과를 점검한다. 학업이나 직장 업무나 별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동양의 일등성인 공자(孔子)는 일하고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것을 배우라(學)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동에 반대되는 여가활동을 학교(Scholē)라 했다. 이로 보듯 학교란 각기 맡은 일을 끝낸 후 자유로이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즐기는 곳이다. 옛날 청소년들도 가업이나 농사 등 각자의 처지에 맞는 일을 하고 끝나면 놀거나 공부했다. 요즘처럼 모두가 시간에 맞춰 배우기만 하는 것은 스승을 도와 일을 배우던 도제(徒弟)수업이었다.

이게 학생의 비극이다. 학교의 원래 의미가 놀이나 여가인데, 오늘날의 학교에서 놀이를 책상에 앉아서 받아쓰고 외우기에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공부라는 빌미로 외우면서 놀 수 있나? 그렇게 놀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부모는 공부하며 놀라고 한다. 학교공부로 놀아? 놀 만해야 놀 것이다.

보통 주어진 일을 하면 보수를 받는다. 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려면 수업료를 낸다. 그런데 보라. 우리나라는 고등학교까지 컨베이어벨트에 앉아 동일한 일을 획일적 교과서에 맞춰 외운다. 열에 하나 좋아할까 말까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보자면 공부만한 중노동도 없다. 그런데도 돈을 받기는커녕 낸다. 좋아하지도 않고, 필요도 못 느끼는데 돈까지 내니 억울해 잠이 안 올 지경이다.

학생같이 더러운 직업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열 명이 근무하는 회사에만 가도 분담 업무가 다 다르다. 각자의 적성에 따라 영업, 회계, 자재관리를 한다. 공부 못해 영업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기에 다른 전문 업무를 갖는다.

하지만 보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전국적으로 각 학년별 약 50만 명이 완전히 동일한 업무만 한다. 어려도 체질은 다 다르다. 영업, 창고, 운송 빼고 나면 정말 하루 종일 앉아서 즐겁게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타고난 책상물림은 많이 잡아도 각 연령별 10만이 안 된다. 따라서 책상물림 작업에 적응 못하는 40만은 어린 시절 내내 학교나 집에서 머리가 나쁘고, 품성이 바르지 못하며, 싹수가 노랗다는 인격 모독적인 구박을 받는다. 전 학년 걸쳐 전국적으로 약 480만 명의 학생이 직업적합성 문제로 인격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학교라는 직장환경도 극도로 열악하다. 한반에 약 30명가량이 같이 생활하고 작업 하는데, 작업실 내에서는 온갖 욕설과 폭력이 난무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선함은 성적이고, 최악은 공부 못해도 해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리고 나서야 다른 데서 다른 일이라도 할 것 아닌가!

직장인은 업무 끝나면 자기가 원하는 생활을 한다. 이걸 여가라 한다. 학생도 수업 끝나면 노동에서 풀려나 여가를 즐겨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학교 업무가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대부분 학원에 끌려가 야근을 한다. 어른들은 하루 8시간 이상 노동하면 야근수당을 받지만 학생들은 무작정 강요당한다.

19세기에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아이들이 하루에 감자 몇 알 받고 15시간씩 감자 깎기를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 학생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아니 더 슬프다. 학생의 노동현실을 비판하는 사람조차 없다. 개성과 취향에 상관없이 15시간씩 동일 작업에 내몰리고 학급석차를 급여로 받는다. 감자는 그나마 먹을 수나 있다.

영양가 없는 선진국 이야기 하나 하자. 선진국 애들은 학교 끝나면 알아서 논다. 숙제도 별로 없고 학원은 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들이 더 잘한다. 한국보다 떨어지는 곳에 돈쓰고 유학 보낼 만큼 한국 부모가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 머리가 더 좋은 것인가? 세계에서 아이큐 제일 높은 지역이 한국이다. 노력을 더 하나? 노동시간은 한국이 최고다. 그럼 뭐냐?

머리 좋고 노력을 많이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장벽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니 책상에 앉혀놓고 일렬로 세운다고 모두의 능력을 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변호사와 의사 만들 수 없다면 밴드의 음악인, 농산물 거래상인 혹은 트럭운전사도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해야 전문가도 생긴다.

학생은 직업이고 공부는 일이자 노동으로 인정하자. 직장을 파하면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듯 학생도 학업 노동을 끝내면 학생이 아니라 자유시민이다. 선진국 대학이 우리보다 더 머리 좋고 더 노력해서 뛰어난 것이 아니라 취향에 따른 일과 삶을 구분하기에 뛰어난 것이다. 야간자율학습이나 학원으로는 결코 뛰어남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공부는 노동이 아니라 우기고, 학교 밖에서조차 학생을 학생이라 여기는 데 있다. 다시 말하건대 공부도 노동이다. 마땅히 학생들에게도 노동윤리를 적용해야 한다. 아니라면 학업과 노동의 확실한 구분을 보여야 할 것이다. 기억하자. 학생이란 학생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행복과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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