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왕진화 기자
  • 입력 2020.01.19 18:31

화려함 멀리하고 실속 추구…'식품·유통 거인' 재계 5위 롯데 '신화' 창조
영결식은 22일 오전 7시 롯데콘서트홀(롯데월드몰 8층)에서 거행

(사진제공=롯데그룹)
(사진제공=롯데그룹)

[뉴스웍스=왕진화 기자]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롯데그룹은 19일 "이날 오후 4시 29분에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며, "장례는 롯데그룹의 창업주인 고인을 기리고자 그룹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이며 발인은 1월 22일이다. 영결식은 22일 오전 7시 롯데콘서트홀(롯데월드몰 8층)에서 거행된다.

명예장례위원장은 이홍구 前 국무총리와 반기문 前 UN사무총장이 맡고, 장례위원장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와 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맡을 예정이다.

(사진제공=롯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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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롯데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기업명과 상품명으로 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베르테르는 그의 여인 샤롯데에 대한 사랑에 있어 정열 그 자체였습니다. 그 정열 때문에 그는 즐거웠고 때로는 슬펐으며 그 정열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사를 수 있었습니다. 일 할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정열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지만, 정열이 없으면 흥미도 없어지고 일의 능률도 없어집니다. 경영자의 정열과 직원 모두의 정열이 하나의 총체로 나타날 때 그 회사는 큰 발전이 기약됩니다. 뜨거운 정열을 갖고 업무에 임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1921년 울산에서 태어난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0년대 초 20대 초반의 나이에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팔이, 우유배달 등의 일을 하면서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다녔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얼마나 신용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 건너가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오나 어떤 경우에도 우유 배달시간이 워낙 정확해 유명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다 보니 주문이 늘어나 배달시간을 못 맞추게 되자 신 명예회장은 자기가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고 한다. 배달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이러한 신 명예회장의 신용과 성실성을 지켜본 '하나미쓰'라는 일본인이 사업을 해볼 것을 제의하며 당시 돈 5만 엔을 선뜻 내 주었다. 이 돈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는데,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하고 전소되고 만다. 어렵게 재기에 나섰으나 다시 폭격을 당해 전소되어 버렸다. 그래도 하나미쓰의 신 명예회장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재기에 성공해 일 년 반 만에 이 돈을 모두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하나미쓰에게 따로 집을 한 채 사 주었다고 한다.

(사진제공=롯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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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 명예회장은 야심차게 펼친 첫 사업이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고 재기에 성공하며 진정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일본에서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롯데를 세우며 1948년 껌을 시작으로 1964년 '가나초콜릿', 1969년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일본 제과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 이후 1967년 한국에서 롯데제과를 설립한 뒤, 호텔 사업과 백화점 사업까지 진출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건립하면서 롯데는 제과업에서 유통업, 서비스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유통업을 통해 롯데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신 명예회장의 신념이었다. 당시에는 산업기반이 취약한데다 국내에 외국손님을 불러놓고 대접할 만한 변변한 국제 수준의 호텔도 없었고 관광 상품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광업 자체가 부지확보와 투자재원 조달의 어려움, 낮은 수익률, 운영 노하우의 미숙 등으로 민간투자가 저조한데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신 회장은 고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호텔업도 기간산업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호텔 건설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호텔 사업 구상은 신 회장 개인적으로는 모험이었다. 투자한 만큼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기업인으로서 마땅히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목표로 했던 꿈을 고국에 실현한다는 의미 하나로 결단을 내렸고, 그렇게 탄생한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월드와 롯데면세점에도 대규모 투자를 이어갔고, 국내 최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 건설에도 주력하는 등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이끌어 올렸다. 

(사진제공=롯데그룹)
(사진제공=롯데그룹)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 명예회장의 집무실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하는 그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 명예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도 혼자서 직접 서류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기업 회장들과 달리 사무실이 아주 소박했다고 전해진다. 크기나 장식이 중소기업 사장 집무실 정도였다. 대기업 회장으로서 색다른 모습인데, 이는 워낙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신 명예회장의 스타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에도 신 명예회장은 정보기술(롯데정보통신), 편의점(코리아세븐), 할인점(롯데마트), 영화(롯데시네마), 온라인쇼핑(롯데닷컴), SSM(롯데슈퍼), 카드(동양카드 인수), 홈쇼핑(우리홈쇼핑 인수) 등으로 사업 영역을 계속적으로 넓혀나가며 롯데를 재계 서열 5위 그룹으로 키웠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과는 별개로,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인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정신건강 문제가 드러나고 90대 고령에 수감 위기에 처하는 등 큰 수난을 겪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이 재계를 이끌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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