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현건 기자
  • 입력 2020.01.30 17:24

"직권남용은 인정…'의무없는 일 했는지' 여부는 개별적 판단 필요"
국정·사법 농단, '유재수 감찰무마' 조국 전 장관 재판에도 영향 미칠듯

(사진=대법원 홈페이지)
(사진=대법원 홈페이지)

[뉴스웍스=전현건 기자]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시절 특정 문화·예술계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시 재판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 선고에서 각각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지난 2018년 1월 2심 선고가 내려진 뒤 대법원 심리를 거쳐 약 2년여 만에 다시 파기환송심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날 김 전 실장과 함께 조윤선·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및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김소영 전 문체비서관 등이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지금까지 '적폐수사' 등에 적용돼온 '직권남용죄'에 관련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최초의 판단이란 점에서 향후 관련 재판들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직권남용죄란 형법 123조에 규정된 조항으로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한다. 그간 법조계에서는 직권남용에 대해 공무원 '직권'의 범위 및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점에 대한 해석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왔고, 유·무죄 판단을 내림에 있어 하급심에서의 판단이 엇갈린 경우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은 이날 '의무 없는 일'에 대한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제시했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해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공무원에게 특정 인사 지원 배제를 지시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해서 그 '직권을 남용'한 것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정부 지원금을 신청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문예위 등이 수행한 각종 사업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범죄성립요건인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는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지시를 받는 쪽)이 공무원이거나 공공기관 임직원인 경우에는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서로 간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협조하는 등의 행위를 법령상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 전 실장 등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나 예술가 등에 대해 이름과 배제 사유 등을 정리한 문건(블랙리스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기초로 정부지원금 등을 줄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정치권력에 따라 지원금을 차별해 헌법 등이 보장하는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히 침해했다"며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을, 조 전 장관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은 "정부와 다른 이념적 성향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를 좌파로 규정해 명단 형태로 관리하며 지원을 배제하는 것은 헌법 원칙에 어긋난다"며 김 전 실장에 징역 4년, 조 전 장관에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8년 2월 이 사건을 소부 2부에 배당했다가 같은 해 7월 전원합의체로 넘겨 1년 6개월간 심리해왔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는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열린다.

대법원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 '사법농단' 의혹 사건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도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돼있는 만큼 이번 선고 결과가 미칠 파장 등을 감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최근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재판 역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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