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윤현성 기자
  • 입력 2020.02.06 13:45
5일(현지시간) 숨진 할리우드 배우 커크 더글라스.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뉴스웍스=박명수·윤현성 기자] 60년 넘게 배우로 활동하며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았던 ’터프 가이’ 커크 더글라스가 별세했다. 향년 103세. 구체적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5일(현지시간) AP통신, 할리우드 리포터 등 외신에 따르면 커크 더글라스의 아들이자 역시 할리우드의 명배우 중 하나인 마이클 더글라스(76)는 페이스북 성명을 통해 부친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자신의 SNS에 "아버지가 오늘 103세의 일기로 우리를 떠났다는 사실이 슬프다"며 "커크 더글라스는 황금시대의 배우였고, 인도주의자였으며 정의에 대한 헌신은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기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의 황금기를 경험하고 인생의 황금기까지 보낸 배우이자 정의와 자신이 믿었던 대의에 헌신해 모두가 우러러볼 기준을 세운 박애주의자"라며 부친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 수 세대 동안 지속될 영화의 유산을 남겼고, 대중을 돕고 지구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유명한 자선가로서 역사에 남을 것"이라며 "아빠,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당신의 아들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커크 더글라스의 아들 마이클 더글라스가 자신의 SNS에 남긴 추모사(사진=Michael Douglas 인스타그램 캡쳐)
커크 더글라스의 아들 마이클 더글라스가 자신의 SNS에 남긴 추모사(사진=Michael Douglas 인스타그램 캡쳐)

1916년 미국 뉴욕 주 앤스터댐에서 가난한 러시아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커크 더글러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 노점상, 정원사 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의 꿈을 키워왔던 그는 드라마 예술아카데미에 진학했고 1941년 졸업 공연으로 진행된 ‘봄이여 다시’를 통해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징집돼 해군으로 복무했다.

제대후 1946년 영화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활약했다. 1949년 영화 '챔피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유명 배우가 됐다. 이후 '열정의 랩소디' '해저 2만리' 'OK 목장의 결투' '스파르타쿠스' ‘죽음의 모래’ 등에 출연하며 세계적 배우가 됐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9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커크 더글라스는 1996년 제6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공로상, 1999년 제5회 미국 배우 조합상 공로상을 수상했다.그는 '챔피언' 등 포함해 세 차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으로 후보가 됐지만 끝내 수상은 못했다. 

그는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 때 공산주의와 연루된 의혹으로 할리우드에서 배척된 영화인들이 일터로 복귀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그는 2011년 뉴욕타임스(NYT)에 보낸 서한에서 당시 블랙리스트에 대항해 친구인 트럼보를 지원한 일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선택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숱한 염문설을 뿌렸다. 1943년 배우 다이애나 웹스터와 결혼했다가 1951년 이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4년 세 살 아래의 앤 바이든스와 결혼해 60년 넘게 해로했다.

커크 더글라스는 지난 1991년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척추수술을 받았고 1996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언어장애를 겪는 등 건강이 크게 악화됐지만 회복한 뒤 활발한 자선활동을 이어왔다. 기부를 위해 더글라스 재단을 설립했고 세계 분쟁 지역에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2015년에는 부인 앤과 함께 세인트로렌스 대학 등 여러 곳에 80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할리우드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인물이 타계한 만큼 전 세계에서 고인을 향한 추모가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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