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18 10:29
구한말 서울을 방문한 체코인이 촬영한 민가의 모습. 가족이 둘러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도 꿋꿋하게 역경을 헤쳐온 민초들의 분위기를 읽게 만든다.

“전주이씨”입니다 하면 “왕족이네요”하며 답이 돌아온다. 이에 “노비로 지내시던 고조할아버지께서 사신 겁니다”라고 응수하면 상대는 당황한 듯 “아! 네”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진실은 언제나 외로운 법이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계급론이 유행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인구 반 이상이 짱짱한 금수저 족보인 김, 이, 박이다. 비록 지금은 남루한 흙수저라도 원래 비까번쩍하던 금수저였다는 뜻이다. 진짜 그럴까? 순진하다.

조선이라는 곳은 “전하! 통촉하시옵소서”를 외치던 충신과 남편의 뜻을 기리며 수절하는 청산과부,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중무장한 효자들이 득실거리던 ‘옳고 곧은’ 세상이 아니었다. 열녀가 필요하면 열녀를, 효자가 필요하면 효자를 만들어 내던 가혹한 곳이었다. 충신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러니 순수함의 고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북한 같은 통제사회와 더 유사했다. 그저 비극적인 드라마로 막을 내린 조선왕조의 결말을 짠하다고 할 뿐이다.

조선 말기는 지금보다 더 정치 권력과 재벌의 횡포가 심했다. 국민의 40% 이상이 금수저 은수저 가문에 속한 사노비(私奴婢)였다. 다른 10%는 관청에 속한 관노(官奴)였고 나머지 30% 정도가 겨우 상놈, 즉 상민(常民)이었다. 물론 여기에 천민(賤民)도 들어간다. 한 마디로 전 국민의 80%가 성씨 따위는 갖지 못했었다는 말이다. 나머지 20%에서도 전문가 집단인 중인을 제외하면 김, 이, 박 같이 폼 나는 성씨를 지닌 금수저 양반은 10% 언저리였다.

신라부터 조선까지 대부분의 주요 관직에 오른 관료는 50여 가문 출신이라 한다. 그렇다. 바로 이 가문이 속한 성씨야 말로 진짜 금수저다. 50여 가문이 지속적으로 지배했다 함은 부(富)를 성공적으로 세속 했음을 의미한다. UN 자료에도 나오듯 OECD에 속한 다른 나라는 자수성가가 강세라면, 우리는 그 반대의 상황이다. 1000년 이상 이어 온 금수저 만의 재산증식과 절세의 노하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즉 소득의 양극화는 우리의 유구한 전통이라는 말이다. 전통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이제 다시 계산해 보자. 지금까지 자신과 가문을 되돌아보라. 확실히 상위 10%에 속할 자신이 있는가? 내 경우 거의 언제나 90%의 아랫목에 있었다. 진짜 전주 이씨라면 그에 합당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없다. 초등과 중등, 고등과 대학에 이어 대학원박사까지 공부로나 운동으로나 절대로 상위 10% 따위에는 들지도 못했다.

공부 못해도 때리고 돈 없어도 때리는 시절을 시종일관 몸으로 때웠다. 가문? 시골에서 상경해 서울 변두리로만 이사 다니며 살았다. 왕족이라면 귀티나 품격이 나야 한다. 하지만 백화점보다 시장이 좋고, 품격 넘치는 레스토랑보다는 길거리 꼬치나 떡볶이가 좋은, 싸구려로 중무장한 싼마이다. 이러니, 진짜 전주 이씨가 진짜 전주 이씨일 리 만무하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금수저 은수저 물고 주인집 금지옥엽으로 태어나면서 바로 멋진 성과 이름을 갖는다. 그 집 하인은 평생을 모진 고생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주인집에 몽땅 바친다. 겨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방계의 죽은 서자 아래 만들어 놓은 쪽 족보 한 장 움켜쥔다. 혹 이름 없는 하녀나 관기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평생 모은 돈으로 자식은 남의 집에서 부끄럽게 살지 않게 했다. 그렇게 홀어머니는 자식이라도 떳떳한 아비노릇 하라고 일렀다.

왕족이 아닌 짝퉁이라도 홀어머니, 고조할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성이 더 없이 소중하다. 탐관오리 왕후장상 조상보다 무지렁이라도 우리를 아껴주신 부모님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전주 이씨보다는 이름도 남기시지도 못한 우리 할아버지 이씨라 더 내세우고 싶다. 금수저의 풍요로움이 부러울 수 있지만 그 보다는 흙수저 만의 자부심 가득한 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게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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