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21 10:33
jtbc가 방영한 화제작 '밀회'. 여교수와 제자의 사랑을 그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오래 전에는 스승과 제자의 섹스가 제법 흔했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가 <밀회>라는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해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었고, 스승과 제자가 전라(全裸)로 등장하는 연극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이라는 진리의 전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섹스란, 전통적인 기예 전승을 위한 은밀한 가르침 방법의 하나였다. 바로 ‘무릎과 무릎 사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난리가 날 성추행이지만 조선시대에서는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었다.

잘 생긴 고수(鼓手)이면서 명창인 사람이 예쁘장한 기생을 앉혀놓고 가야금 산조를 가르친다고 하자. 향긋한 기생방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무릎이 맞닿아 소근 거리는 수업이 벌어진다. 서로 손을 잡고 현을 타며 가르치고 배우다보면 종종 팔이 겹치고 허벅지가 꼬인다. 선생님은 오빠 되고, 오빠가 아빠 되는 건 순식간이다. 이렇게 전통교육에서 스승과 제자의 섹스는 흔했다.

명인 함동정월(咸洞庭月)의 삶이 그랬다. 예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였던 그는 판소리 고수(鼓手)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에 예기(藝妓)로 권번에 적을 올리고 정악, 승무, 검무를 배웠다. 그러다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의 문인 최옥산(崔玉山)에게 가야금산조를 전수받는다.

비교적 활동이 편한 기생의 신분이었기에 레코드를 취입하여 명성을 얻고, 일본까지 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고수(鼓手)이자 명창인 김명환과 동거하며 최옥산류에서 진일보한 함동정월류를 열어 일가를 이룬다. 이후 한양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는 스스럼없이 여덟 명의 성이 다른(同腹異姓)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각기 다른 여덟 스승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명인은 기예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명인이 감춘 특별한 비밀이 가문을 지탱하는 밑천이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 명인이 가문의 ‘특별 조리법’을 가족에게만 알리는 것과 같다. 만약 비법을 모두에게 공개한다면 집안 말아먹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인간문화재나 명인의 가르침을 받으려면 가문에 들어가 밥 짓기, 물 깃기, 빨래 등 온갖 궂은일을 해야 겨우 한 꼭지 배운다. 동양에서는 사승(師承)이고, 서양에서는 도제(徒弟)다.

기예는 가족에게만 전수한다. 가족이 되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명인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다. 다음은 섹스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기다. 그래서 남자 제자는 스승의 딸과 결혼하고, 여자스승은 여자 제자를 수양딸로 삼는다. 남자 스승은 여자 제자를 아내나 첩으로 삼기도 한다. 가족 아니면 가르쳐 줄 수 없는 가문의 밥줄 때문이다.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의 가승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근대 대학은 교수와 학생이 무릎을 밀착해서 비밀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객관적 지식을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교수는 학생과 멀찍이 떨어져서 객관적 지식과 진리를 설파한다. 따라서 지식의 해방구인 대학에서 달라붙어 전하는 ‘비밀 전수’는 당연히 금기 항목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음대 성악과의 막장극, 인분교수는 무엇인가? 이들은 자기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자부하며 대학에다 가문을 일구고는 개인적인 사승 관계를 만들고자하는 자들이다. 자유롭고 공개적인 진리의 장에서 무릎과 무릎이 맞닿는 비밀 지식을 주장한다. 이들에게 여성 제자는 첩이고 남성 제자는 노비다.

학생을 노비로 여긴다는 면에서 음대는 소수의 영역에 불과하다. 공대 실험실은 비리의 온상으로 유명하다. 일가를 이뤘다는 교수는 박사 학생을 10년간 머슴으로 부린다. 학생의 장학금이나 임금을 갈취하는 교수는 학생을 가문의 소작인으로 이용한다. 교수 가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수채용 비리나 알력이란 가문들 사이의 권력 투쟁일 뿐이다. 때문에 교수가 대학에 가문을 일구는 한 <밀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될 것이다.

지식의 해방구인 대학에서 교수 가문의 비밀스러운 전승은 옳은가? 기예의 전수가 전통이라고 꼭 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이다. 말년에 함동정월이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예인들에겐 예술 활동을 자유롭게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그게 그렇질 못해요. 지금 생각하면 ‘좋았던 시절’을 속아만 살아 왔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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