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만수 기자
  • 입력 2020.03.09 15:52

[뉴스웍스=최만수 기자] 미래통합당의 TK(대구·경북) 공천 결과를 놓고 말들이 많다. ‘과메기 공천’이니 ‘TK 대학살’이니 단골 비판이 어김없이 나온다.

TK는 보수 정서가 짙어 ‘아무나 공천해도 당선 된다’는 보수 정당의 '근자감(근거 있는 자신감)'이 유독 강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칼자루를 거머쥔 공천관리위원회의 '칼춤'에 따라 현역이나 정치 지망생들의 명운이 판가름 나기 일쑤다.

TK는 역대 총선 때마다 공천 잡음이 유난히 심했다. 2007년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포항)·박근혜(대구)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부터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친이(親李·친이명박)·친박(親朴·친박근혜)으로 갈라진 게 발단이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 치러진 2008년(18대 총선), 2012년(19대 총선), 2016년(20대 총선) 세 번의 선거에서는 상대 진영에 대한 살생부가 돌 만큼 무자비한 '공천 학살'이 되풀이됐다. 

18대 총선에선 친박 인사들이 ‘친박연대’란 희한한 결사체를 만들더니 4년 전, 20대 총선에는 진박(眞朴·진짜친박) 감별사까지 등장했다. 가히 계파정치의 결정판이다.

20대 총선에서 TK는 친박으로 포장한 초선들이 대거 여의도에 입성했다. 특히 경북은 계파 색채와 상관없이 13명 모두 새누리당으로 채워졌다.

12석의 대구는 당 공천에서 탈락한 유승민·주호영 의원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홍의락(당시 무소속)·김부겸(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제외하고 새누리당이 8석을 휩쓸었다. 유승민·주호영 의원도 지금은 미래통합당 식구가 돼 10석이 보수 야당 몫이 됐다.

4년 전, 금배지를 단지 1년도 안 돼 친박들은 헌정 사상 초유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용돌이 속에 숨죽여야했다. 보수는 분열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헌법재판소가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거대한 촛불 물결에 휩쓸려 분열된 보수는 힘도 써보지 못한 채 진보에 정권을 넘겨줬다.

한때 보수진영엔 박근혜 대통령의 그늘을 지우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2017년 1월 유승민, 김무성 등 탄핵 찬성파들이 바른정당을 만들어 새로운 보수, 개혁 보수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선에서 유승민 후보가 참패하자 김무성 등은 그해 11월, 10개월 만에 슬그머니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소수 야당의 한계를 절감하고, 거대 야당에 의탁했다.

이후 보수는 여러 갈래로 흩어졌지만 4.15총선을 앞두고 ‘뭉쳐야 이긴다’고 의기투합해 통합의 모양새는 갖췄다. 줄기차게 "탄핵의 강을 건너자"고 주창한 유승민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덩치를 키운 통합당은 문재인 정부가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서 지지율이 50%대 밑으로 하락한 틈을 비집고 ‘정권 심판’을 부르짖으며 총선 승리라는 단꿈을 꾸고 있다.

갈가리 찢어졌던 보수 텐트도 총선을 앞두고 서둘러 짜깁기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넘어 1당마저 넘보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거름’도 별로 안 주는데도 여전히 든든한 텃밭인 TK에서 어김없이 싹쓸이하고 여세를 몰아 수도권에서 약진한다면 해볼 만한 선거라고 판단하고 있음직하다.

두 거대 정당의 공천 과정을 지켜보면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작업은 순탄한 반면, 통합당은 소란하고 혼란스럽다. 더군다나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 메시지로 자유공화당과의 통합작업이 시작되면 보수진영의 ‘밥그릇’ 싸움이 더 노골화될 것으로 보인다.

TK 공천을 바라보는 지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물갈이도 좋지만 지역 정서를 무시하고 공관위에서 찍어 내리면 그만이냐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무소속 출마 러시도 예견된다.

공관위는 일찌감치 TK 절반 이상 물갈이를 공언했지만 막상 공천 뚜껑을 열자 의외의 인물들이 단수 추천되면서 ‘우리가 핫바지냐’란 원성이 거세졌다. 지역에서 뿌리박고 활동해 온 인물들이 배제되고 정치 신인들에게 경선 기회가 돌아갔다. 당에서 푸대접 받은 보수적 인사들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통합당 공관위의 속내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TK 공천의 큰 줄기는 세대교체, 여성 중용으로 읽혀진다. 대구에선 양금희 예비후보가 북구갑에, 이두아 전 의원이 달서구갑에 단수 공천됐다. 이진숙 전 MBC기자가 동구갑에, 이달희 전 경북도 정무실장이 북구을에, 이인선 전 경북도 경제부지사가 수성구을 경선에 나선다.

경북에선 임이자(비례대표) 의원이 김재원 의원 지역구(상주·군위·의성·청송)에 단수 추천됐다. 포항 북에선 현역인 김정재 의원과 강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맞붙는다. 포항남·울릉에선 현역인 박명재 의원이 '용퇴'하고 문충운·김병욱 예비후보 경선으로 압축됐다. 경산에선 조지연 미래통합당 청년부대변인이 윤두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과 경선한다.

방향은 옳게 잡았지만 유독 TK에서 공관위의 전횡이 두드러진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TK에선 불출마(5명), 의원직 상실(2명), 컷오프(7명)를 포함해 현역 20명 중 14명이 공천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역대 최대인 70% 이상이 물갈이되는 셈이다.

이처럼 TK는 공관위가 공천을 쥐락펴락해도 당락 여부에 큰 영향이 없는, 보수 정당 입장에선 참으로 다루기 편한, 그들의 전유물이 아닐 수 없다. TK는 보수의 텃밭이기에, 누구를 심어도 당선이 쉽기에, 공천에 사심이 끼어들 소지가 다분하다. 공천이 아니라 사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친이·친박 줄타기를 잘해 공천장만 받으면 당선은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지역에서 아무리 열심히 터전을 다져본들, 중앙에서 갑자기 줄 타고 내려온 ‘낙하산’들이 금배지를 잘도 채갔다.

공천이 당선을 좌우하다보니 의원들은 지도부 심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마련이었다. 당의 대여 투쟁엔 돌격대를 자처하기도 한다. 당 충성도가 공천의 잣대 중 하나인지라 내키지 않아도 나서야 할 때도 많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렇더라도 의원 개개인이 하나의 헌법기관이라고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당 방침에 배치되더라도 소신발언을 하는 의원이 나와야 건강한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정가에선 TK 정치인들을 온실 속 화초처럼 여기고 있다. 보수의 본산 출신이란 지역적 영향력에 편승해 권력 핵심에 접근하기도 쉬웠다. 친이·친박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만 재주껏 드러내면 재선, 3선은 비교적 수월했다. 이러니 수백표차로 승부가 엇갈리는 수도권 험지 출마는 딴나라 얘기나 다름없다. TK 의원들은 4년 주기의 공천 칼끝만 잘 피하면 본선은 사실상 '땅 짚고 헤엄치기'다.

역설적으로 '공천=당선'이란 등식이 유효하는 한 TK 의원들의 운명은 공관위가 계속 결정할 수 밖에 없다. 부정할 수 없는 TK의 정치현실이다. 그것이 싫다면 무소속으로 출마해 '살아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TK 보수 의원들의 '생환'이 늘어나야만 공관위의 독단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험지는 험지대로, TK는 TK대로 ‘특권은 많고, 책임은 별로 없으면서, 대우는 좋은’ 300인 입법기관의 일원이 되기가 그리 쉬울까. 다 자기하기 나름이다.

TK 지역민들도 당 공천 후보의 '묻지마 투표'에 동참하기 보다는 후보 됨됨이나 능력, 청렴성 등에 한표 행사하는 것이 주권자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란 점을 되새겼으면 한다. 그것이 TK의원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관위의 위세도 줄여 민주주의를 보다 발전시키는 첫걸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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