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현건 기자
  • 입력 2020.03.31 18:19

외교부 '임수경 방북 사건' 관련 1989년 외교문서 한 권 분량 비공개 결정 내려 '물의'

(사진출처=YTN 뉴스 캡처)
한-헝가리 외교관계 수립 합의록. (사진=YTN 뉴스 캡처)

[뉴스웍스=전현건 기자] 노태우 정부가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와 수교하기 위해 거액의 차관을 건넨 사실이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외교부는 31일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 1577권(24만여쪽)을 원문해제(주요 내용 요약본)와 함께 일반에 공개했다.  

1989년 외교 문서가 중심으로 동유럽 국가와 국교 수립 관련 사항,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의 방한 관련 사항 등 노태우 정부 초기의 주요 이슈들이 담겨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노태우 정부는 88서울올림픽 개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였고, 경제난에 봉착한 동유럽 국가들도 한국과 경제협력을 위해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차관 제공이 수교의 중요한 조건이었다는 것이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한국과 헝가리가 지난 1988년 8월 12일 서명한 '합의 의사록'에 따르면, 6항에 '양측은 상주대표부가 설치된 후에 양국 간 외교관계 수립에 의한 쌍무관계 정상화를 위한 교섭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7항에 '양측은 대한민국이 8항 (a)호 (ⅴ)에 규정된 경제협력계획의 약속을 50% 이행했을 때에 6항에 언급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고 적시돼있다.

8항은 경협에 대한 사항으로 (a)호에는 '한국 정부는 헝가리 측에게 미화 6억5천만 달러에 달하는 아래의 경제협력을 제공한다'고 적혀있고 다섯 가지 지원 방안 중 맨 마지막인 (ⅴ)는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은행차관'이다.

즉 '한국이 헝가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6억5000만 달러의 경협자금을 제공하고, 특히 약속한 은행차관의 절반인 1억2500만 달러를 헝가리에 제공한 뒤에야 수교한다'는 내용이 명문화된 것이다.

'합의 의사록'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은 실제 1988년 12월 14일 1억2500만 달러 규모의 은행 차관 계약을 체결했고, 양국은 이듬해 2월 1일 수교했다.

정부는 협상 전 작성한 보고서에서 헝가리의 경협 제공 요구에 응하면 '다른 국가와의 수교 및 경협 확대 시 동종 요구 가능성'이라고 우려했는데, 실제 한국은 그해 11월 폴란드와 수교하면서도 4억5000만 달러의 경협을 제공해야 했다.

노태우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일왕(天皇·덴노)을 초청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양측이 적극적으로 검토한 과정도 공개됐다.

정부는 1989년 6월 노태우 대통령의 이듬해 일본 방문을 준비하면서, 방일 이후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의 방한을 고려할 것을 외교 과제로 제시했다.

일본에서도 일왕의 한국 방문 가능성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4월 최호중 외무장관과 회담한 우노 소스케 외무상은 "한국 측 분위기가 성숙했다고 판단되면 일본 정부로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키히토 일왕의)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서 방한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일왕의 방한은 이후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 요구에 수반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일본에선 보수 우경화 흐름이 강해지면서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이 밖에 노태우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여부를 놓고 노동운동 격화 우려에 따라 갈팡질팡했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문서도 공개됐다.

한편 외교부는 1989년도 생산된 외교 문서의 기밀을 해제하면서 그해 최대 이슈였던 임수경 무단 방북 사건 관련 문서는 비공개해 물의를 빚고 있다. 당시 사건과 관련해 현 정권과 관련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내용이 다수 포함돼 공개를 꺼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야권에서 나오고 있다. 

임수경 씨는 대학 재학중이던 19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석했다. 서울에서 일본 도쿄로 관광 목적으로 출국한 뒤 독일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국한 직후 체포됐다. 당시 전대협 의장이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방북을 주도했다.

임씨가 해외 여러 나라를 거쳐 방북했지만 이번 외교문서 공개 대상에는 관련 내용이 거의 없었다. 임씨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문서 한 권(약 160쪽 분량)이 있었지만 외교문서 공개심의를 거쳐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그해 8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이 "임수경 투옥과 한국 좌파 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비판했다" 등 내용만 일부 담겨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비밀방북했는데 외교문서가 방북 과정에서 하나라도 생산됐는지 모르겠다"면서 "간략하게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외교문서이기도 하지만 개인 문서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데 작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일부 과정에 대해서는 외국 정부와 나눈 이야기가 외교문서로 남아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외교문서가 쭉 있는데 그중에 대부분을 공개 안 했다고 볼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다만 현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임시 휴관 중이다.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 및 도서관 등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총 27차례에 걸쳐 2만8000여권(약 391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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