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25 10:36
한국 영화의 화제작이었던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 포스터. 인생 50줄에 이르면 마치 한 물 지난 듯한 느낌이 찾아온다. 영화 속 유행에서 멀어진 라디오 스타와 비슷한 처지다.

비 오는 날 침침한 백열등 아래 파전과 막걸리는 환상이고, 오랜 친구가 함께하면 금상첨화다. 친구가 반가운 것은 잠시 모든 상념을 떠나 푸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이 오십 줄에 이르면 천명(天命)을 알게 된다고 한다. 몸으로 느끼는 똑딱이는 소리가 그것이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초침이자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 한참을 서성이게 하는 울림이다. 이 소리에 우리는 시합 종료를 앞에 둔 축구선수의 심정으로 들어선다. 막걸리와 파전을 앞에 두고 서로가 뻔한 오십대 몇이 모인다.

알 것 다 아는 선수들이지만 자녀자랑, 사업상 애로로 시작한 이야기는 서서히 똑딱거리는 초침으로 넘어간다. 다행히 마누라의 암을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경과가 좋았다거나, 몸이 예전 같지 않고 허리 디스크 때문에 고생이라는 등 서로를 만져주는 동안 마음의 빗장이 열린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친구도 나이가 들면서 이상하게 가정과 자기의 욕구가 예상을 빗나간다고 푸념한다. 누군가는 자기가 동정과 연민을 받는 것 같다는 토로를 하자 모두의 손은 저절로 막걸리 잔으로 향한다. 그만큼 속이 타는 것이다. 지금까지 동정과 연민을 받으며 살아오지 않았기에 두려운 것이다. 젊었을 때는 용감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곤경을 극복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늦었다. 연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막걸리가 한 순배 더 돌고나서는 똑딱 소리가 주는 위기의식이 좌중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한 친구가 얼마 전에 우연히 등산 동호회에서 만난 여인 이야기를 꺼낸다. 물론 절대 그런 마음은 없다고 하지만 그의 곤궁을 직접 해결해주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꽃뱀을 조심하라는 충고가 여기저기서 올라온다. 당해본 사람의 쓰라린 호응이다. 오랫동안 기러기아빠로 외롭게 지내던 친구는 해외의 마누라도 그런 것 같고, 나도 이제 여자가 생겨 새 삶을 생각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중년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수면에 오른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시계소리의 정체는 바로 서서히 희미해지는 성적인 정체성이다. 하늘을 움켜쥘 듯, 땅을 말아버릴 듯 가슴 뿌듯했던 느낌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삶의 주인공이고 싶었고 세상에 우뚝 서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이 울컥하며 솟아오르던 웅심의 최후가 슬퍼진다. 그러면서 ‘지금 아니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조바심이 찾아온다.

하지만, 비와 막걸리를 앞에 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원래 의도했던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그러한 남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몸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식어버린 파전에 빈 주전자를 뒤로 하고 추적거리며 비가 내리는 길가에 서서 흔들리는 오십대는 고민한다. 도우미가 등장하는 떠들썩하고 흐드러진 2차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귀가할 것인가? 길 위에 선 잠시의 갈등은 큰 외침과 함께 끝난다.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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