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지훈 기자
  • 입력 2020.05.15 09:03

[뉴스웍스=박지훈 기자] 최근 금융회사들이 판 사모펀드 중 일부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판매에 따른 도의적 책임을 지라는 압력도 커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판매사들이 고객에게 손실액을 미리 보상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판매사에게 과중한 부담을 요구하는 풍토가 조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금융투자상품 운용 부실에 대한 책임을 판매사에게 지나치게 물어 무리한 선보상이 이뤄진다면 고객은 자기책임으로 투자한다는 원칙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시중에 판매된 금융투자상품이 막대한 원금 손실을 야기할 경우 금융당국이 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판매사와 투자자의 책임 비중을 산정해 배상이 필요하다면 금융회사에 배상비율을 권고한다.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는 이 과정에서 은행들의 불완전판매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배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운용과정에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무리한 판매가 사태를 키웠기 때문이다.

반면 라임 사태의 경우 현재까지 드러난 상황만 놓고 보면 운용사의 탈법‧사기적 운용이 원금의 대규모 손실을 야기했다. DLF 사태에 비하면 판매사의 항변 여지가 크다.

사정이 이런데도 운용사가 사태를 해결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 속에 판매사들은 선보상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정상제품 인줄 알고 넘겨 받아 판 물건이 불량품인 것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수수료만 받고 판 상인에게 배상책임을 요구하는 격이다.

IBK기업은행은 판매한 디스커버리 US 핀테크글로벌채권펀드에 대해 투자원금 중 일정 비율을 투자자들에게 선지급하고 투자자산을 최대한 회수한 후 나머지 투자금을 돌려주는 방식의 배상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나은행도 판매한 이탈리아 헬스케어 사모펀드의 손실액을 선지급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플루토 FI D-1호 등 라임자산운용펀드)은 노조가 투자자에 대한 피해금 선지급을 요구하고 있고 대신증권의 경우 라임자산운용펀드에 투자해 피해를 본 이들이 지속적으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회사들이 금융투자상품 손실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선보상하는 관례가 생기면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운용사와 판매사의 과실, 투자자의 자기책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지 않은 채 "운용사의 몫까지 일단 보상하고 나중에 구상권을 청구하라”는 방안이 언급되는 것에 대해 판매사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이미 망한 운용사에게서 받아낼 돈이 거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법률 위반 소지도 제기된다. 판매사들이 라임펀드 손실을 보전해 주면 실정법 위반에 처할 수도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현행 자본시장법은 투자자 손실에 대해 사전은 물론 사후에도 보전을 금지하고 있어 위반 소지가 있다”며 “더구나 회사가 투자자에게 지급할 의무가 없는 돈을 배상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면 이는 배임 혐의가 적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의 정기예금과 달리 투자상품은 시장상황에 따라 기대 이상의 손실이 나기도, 엄청난 손해가 나기도 한다. 상품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물론 운용사의 배임 등 범죄행위와 판매사의 과잉판매에 대해 금융당국이 철저한 조사를 거쳐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드러나면 사법적 책임도 져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실정법 논란 위반까지 야기하며 투자의 기본원칙을 허무는 행태가 확산되는 것이 과연 선진 자본시장 발전과 육성에 도움이 될까. 오히려 퇴보만 조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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