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한익 기자
  • 입력 2020.06.10 06:10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튜브 영상 캡처)

[뉴스웍스=이한익 기자] 오늘(10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인 6·10민주항쟁 기념일이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 민주주의체제 수립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거리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이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날로 확대되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를 무시한 채 1987년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초강경책을 동원했다.

여기에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정치적 반대세력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결국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호헌조치 반대성명' 등 민주시국선언을 내놓았고, 민주화투쟁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축소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고, 6월 9일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의 파편이 머리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됐다.

이에 산발적으로 펼쳐지던 민주화 투쟁은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이 총결집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으로 이어져 비폭력투쟁 민주헌법 쟁취 선언, 전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구심체가 됐다.

6월 10일 김영삼·김대중·박형규·김성수·금영균·계훈제·이돈명·송월주·고은·인명진·오충일 등이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해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같은 날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이 집권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 간선제 호헌 방침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급격히 확산, 분출됐다.

이에 6월 15일까지 전개된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 간 전국에서 연인원 500여 만 명이 참여해 '직선제 개헌 민주화 촉구'를 위한 거리집회·시위·농성 등이 이어졌다.

특히 6월 26일 시위에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참가,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를 기록하기도 했다.

국민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돼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바 '6·29선언'이라는 직선체 재헌 시국수습특별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은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의 실현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이 선언 후 혼미를 거듭했던 정국은 수습의 실마리를 찾고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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