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3.29 17:00
청나라 때 그려진 세마도. 버드나무 우거진 그늘 밑에서 말을 씻기는 일의 흥취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곳에는 산성(山城)이 있었고, 그 안에 장수가 거처하면서 싸움을 지휘했던 세마대(洗馬臺)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과 지금의 역명은 그로부터 비롯했다는 설명이다. 말은 예로부터 중요한 전쟁 물자에 해당한다. 특히 지금처럼 무기(武器)가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의 전쟁터에서는 발 빠른 이동 수단, 그리고 적을 몰아치는 중요한 무기로서 말의 쓰임새가 아주 컸다.

따라서 전쟁터와 관련 있는 곳에 ‘말을 씻기다’는 뜻의 洗馬(세마)라는 이름이 붙는 일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洗馬(세마)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단서를 붙여 풀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름이 동양 사회에서는 줄곧 관직(官職)을 일컫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洗馬라는 단어는 전쟁터에서 말을 목욕시키는 그런 이름에 앞서 관직 이름으로 오래 쓰였다. 우리의 예에서도 조선 500년, 그 앞의 고려 왕조에서도 이는 분명히 관직명으로 등장한다. 중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낮은 벼슬의 이름인데, 조선과 고려의 예에서는 왕의 아들인 세자(世子)를 돕는 일을 맡았다.

세자는 흔히 ‘동궁(東宮)’으로도 일컬었다. 왕이 거주하는 동쪽의 궁궐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이다. 洗馬는 그 동궁의 세자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한 자리로서, 조선 때는 낮은 품계에 해당하는 정9품(正九品)의 자리였다. 구체적인 직무는 세자가 행차할 때 그 앞에서 행렬을 보호하는 일이다.

따라서 洗馬라는 한자 명칭은 ‘말을 목욕시키다’의 뜻이 아니라 ‘말이 지나는 앞을 깨끗하게 비우는 작업’이다. 이 洗馬의 앞 글자 洗는 두 가지 발음이 있다. ‘씻다’의 뜻일 때는 우리 발음으로 ‘세’, 다른 새김 ‘깨끗하다’ ‘깨끗이 하다’일 때는 ‘선’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구별한다. 洗馬라고는 같이 적으면서 발음은 ‘선’의 발음을 택해 ‘셴마(xiǎn mǎ)’로 발음한다.

우리 식으로 풀자면 중국인들은 洗馬를 ‘세마’로 발음하지 않고, ‘선마’로 발음한다는 얘기다. 왕이나 황제의 아들은 왕 또는 황제 다음의 권력 서열에 있는 둘째 지존(至尊)의 인물이다. 그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행렬 앞에 서서 ‘앞을 깨끗이 비운다’는 직무를 그렇게 구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洗馬라는 역에서 중국의 용례를 속절없이 따를 필요는 없다. 단지 관직명을 일컬을 때 중국의 예를 참고할 수는 있으나, 이 역명에서 등장하는 洗馬는 옛 산성의 지휘관이 머무르던 곳을 일컬음이다. 따라서 전쟁과 관련이 깊은 셈이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그저 洗馬라고 이해하며 발음은 그냥 우리대로 ‘세마’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여기서는 우선 洗(세)라는 글자에 주목하자. 우선 자주 쓰는 단어로는 세례(洗禮), 세수(洗手), 세면(洗面), 세탁(洗濯) 등이 있다. 워낙 자주 쓰는 말들이라 달리 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세수 또는 세면과 같은 뜻으로 쓰여 덧붙이고자 하는 단어는 관세(盥洗)다. 앞 글자 盥(관)은 손을 씻는 대야, 큰 그릇을 가리켰다. 이어 ‘씻다’라는 새김도 얻었다. 보통은 제사를 올릴 때 깨끗하게 손을 씻는 그릇이나 그런 행위를 지칭한다. 관수(盥手)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세안(洗眼)이라는 말은 안과(眼科) 병원에서 쓰는 말이다. 잡티 등으로 더러워진 눈을 씻는 일이다. 수세(水洗)는 한동안 화장실 오물 처리 방식과 관련해 자주 등장했다. 재래식 화장실이 아니라 물로 씻어내는 방식의 화장실을 가리킬 때 말이다. 세설(洗雪)은 뭘까. ‘눈을 씻어내다’? 아니다. 여기서 눈을 가리키는 雪(설)은 동사다. 굴욕과 모욕을 씻어 내다는 뜻의 ‘설욕(雪辱)하다’의 그 雪(설)이다. 그래서 洗雪(세설)은 원한이나 굴욕감 등을 씻어버린다는 뜻의 단어다.

세병(洗兵)이라는 말도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머무르던 경남 통영(統營)에 그 단어를 단 누각이 있다. 이름이 ‘세병관(洗兵舘)’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지어진 누각이다. 그의 승리를 기록하려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왜 ‘洗兵(세병)’일까. 이는 스토리가 있는 단어다.

주나라(周, 약 BC 1100~BC 256년) 무왕(武王)이 폭군이라고 알려졌던 은(殷)나라 주(紂)왕을 치러갈 때 출정식에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닌 무기와 병사들이 모두 비에 젖었다. 어떤 이들은 출정을 말렸으나, 무왕은 “하늘이 출정을 축하하는 비”라며 공격을 감행해 결국 성공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그래서 洗兵(세병)은 ‘승리를 예고하는 출정식’의 의미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전쟁이 끝난 뒤 무기를 씻는 일’로 이해하지만, 엄연히 잘못이다. 洗兵(세병)은 다른 말로 세갑(洗甲)으로도 쓴다. 여기서 甲(갑)은 병사들의 갑옷, 또는 무기를 가리킨다. 비슷한 말로는 세병감우(洗兵甘雨), 세병갑(洗兵甲) 등이 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얼을 얼마나 잘 간직하고 있나. 그는 빈틈이 없었던 명장 중의 명장이다. 늘 대비하는 자세, 그리고 제 본분을 다하려는 충직(忠直)함의 상징이다. 그렇게 스스로 준비하며 실력을 갖추는 사람은 늘 하늘도 돕는 법이다. 그런 사람이 길을 나설 때 축복의 비도 내린다.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를 연마하며 위기와 도전에 대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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