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4.01 10:34
책은 인류의 지식을 전승하는 중요한 매개다. 독서는 따라서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강요에 의한 억지 독서는 부작용도 낳는다.

‘책따’라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책을 읽으면 왕따 당한다는 뜻이다. 말이 아니다. 학교는 책을 읽는 곳이다. 따라서 책따는 어불성설이다. 이런 언도도단의 현상이 빚어지는 이유가 있다. 학생 자체가 아니라, 책이 문제라는 점이다. 한국인의 독서량이 부족하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지 않고 핸드폰만 본다고 비판한다. 마치 유신시절 ‘하면 된다’는 구호나 다름없다. 핸드폰도 책이다.

고등학교 때다. 학교는 이동수업이라는 편법으로 국어와 영어, 수학 시간만 우열반 수업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가 일찌감치 손을 놓아버린 열등반 인생들은 대학 진학이나 미래의 걱정 없이 독서와 예술로 교양 쌓기에 전념했다. 그렇게 교양으로 충만하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매일 벤치에서 잠이나 자던 나를 부르셨다. 큰 선심이나 쓴다는 듯 “우수반으로 가라”는 맑은 하늘 번개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그 직전의 모의고사를 잘 본 게 탈이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옆에 끼고 들어선 우수반은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태계였다. 이곳 학생들은 수업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었다. 뭐 들을게 있다고 수업에 집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교과서나 참고서 밑에 무협지나 야설조차 없었다. 책상 아래에 인체에 대한 예술적 탐구가 없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유유히 무협지를 꺼내들었지만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심지어 야설이나 예술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등생이란 도무지 독서와 예술을 모르는 한심한 것들이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백곰이 느끼는 생태계의 위기가 그랬을까? 몸으로 겪는 생태계의 변화를 견딜 수 없어 담임 선생님에게 다시 열등반으로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우수반의 며칠은 이렇게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홀가분하게 막을 내렸다.

살아남으려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교실도 하나의 생태계다. 사회에서 옳다고 교실에서까지 옳은 건 아니다. 생존의 절대 진리란 생존뿐이다. 마치 수온이 올라가면 눈이 뜨거워져 죽어버리는 열목어마냥 교과서와 참고서만 먹고사는 우수반에서는 무협지나 야설은 환경오염이다. 아니 독서 그 자체가 빙산을 녹이는 환경가스다. 선생님 말씀대로 면학분위기를 흐리는 미꾸라지다.

반면 열등반은 조금 더 찐득하고 후끈하다. 여기에서 교과서나 참고서는 책 껍질이고, 내용은 야설이나 인체예술이다. 무공해 교과서 청정지역과 후끈한 진창, 두 생태계는 이렇게 다르다. 그렇다. 이게 그 나이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태도이고 독서다. 절대 <전쟁과 평화>나 <논어>는 아니다.

기성세대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다. 반면에 기성세대가 아니라고 여기는 책도 있다. 기성세대의 견해와 달리 나쁜 책이란 없다. 책은 모두 좋다. 그저 나이와 처지에 따라 용도가 다를 뿐이다. 마치 고등학생에게 <전쟁과 평화>는 두꺼워서 베고 자기 좋고, 감옥에서 <성경>은 종이가 얇아 담배로 말아 피우기 좋은 것과 마찬가지다. 베개를 읽는 짓은 미친 짓이고, 담배 종이를 읽는 짓은 똥간에서나 잠시 할 일이다.

미국에서 교미(交尾)활동을 게을리 하는 수컷 소를 위해 포르노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포르노를 본 수소가 흥분해 암소에게 달려가서 회포를 풀었을까? 아니면 콧방귀나 뀌었을까? 포르노를 본 수소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인간과 사촌간이라는 침팬지조차 포르노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포르노와 마찬가지로 독서란 인간만이 가진 상징작용의 산물이다. 이를 읽고 상상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한 포르노나 야설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매한 지적 활동이다.

책따란 무엇인가? 바로 교실이라는 생태계 안에 공통의 관심을 같이 호흡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채 베개나 담배 종이 붙잡고 있는 부류를 말한다. 물론 기성세대의 관점으로는 양서가 배척당하고 벗은 여자나 나오는 <맥심>을 보며 킥킥대는 모습이 안타까울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이는 그저 기성세대의 관점일 뿐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를 키워준 8할이 포르노와 만화라는 것을! 오늘도 학생들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양서를 잘 읽고 있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자라는 시절의 생각과 감성에 맞는 독서가 각기 있다.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섣부른 강요와 규제가 자연스러운 독서를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점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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