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현건 기자
  • 입력 2020.07.23 22:28

집행부 반대파, '해고 금지' 빠진 점 집중 공격…당분간 내홍 심화 불가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21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어준의 뉴스공장' 방송 캡처)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21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어준의 뉴스공장' 방송 캡처)

[뉴스웍스=전현건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23일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에 추인을 얻는 데 끝내 실패했다. 

노사정 합의안 추인을 계기로 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던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정파의 벽을 못 넘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에따라 현 정부와의 대화 통로를 사실상 잃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주노총은 이날 임시 대의원대회를 온라인으로 열고 노사정 합의안 찬반 여부를 표결에 부친 결과 투표인원 1311명(재적인원 1479명) 중 찬성 499명(38.27%), 반대 805명(61.73%)으로 부결됐다고 밝혔다. 

대의원대회는 조합원 총회 다음으로 위상을 갖는 의결 기구다. 조합원 500명당 1명꼴로 선출한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이날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진행한 찬반투표에서 재적 대의원 1479명 가운데 1311명이 투표해 과반수인 805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찬성표와 무효표는 각각 499명, 7명이었다.

민주노총 참여로 22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노사정 합의안은 정세균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지난 5월 출범한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40여일 간의 논의를 거쳐 마련한 것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한 고용 유지, 기업 살리기, 사회 안전망 확충 등을 위한 협력 방안을 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화를 가장 먼저 제안하고 노사정 대표자회의에도 참여했다.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지난 1일 협약식을 열어 노사정 합의안에 서명하려고 했으나 불과 15분 앞두고 민주노총 내부 강경파가 합의안 내용 미흡을 이유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일부 지역본부 대표 등이 김 위원장의 참석을 물리적으로 막으면서 합의 선언은 무산됐다.

김 위원장은 산별노조와 지역본부 대표 중심의 중집에서 노사정 합의안의 추인이 무산되자 조합원의 대표인 대의원들의 뜻을 묻겠다며 직권으로 임시 대의원대회를 소집했다.

대의원대회 소집은 정파의 벽을 넘으려는 김 위원장의 승부수였다. 그는 다수의 중집위원들이 정파 논리에 따라 조직적으로 노사정 합의안에 반대한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민주노총의 최대 정파 조직인 전국회의는 중집에서 노사정 합의안 추인이 최종적으로 무산되기 직전인 이달 2일 성명을 내고 공개적으로 합의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지난달 29∼30일 중집에서는 한 중집위원이 정회 중 김 위원장을 찾아가 "전국회의를 포함한 2개 주요 정파가 노사정 합의안에 반대하기로 합의했다"며 대정부 교섭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임시 대의원대회를 사흘 앞둔 지난 20일 영상 연설을 통해 정파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대의원대회도 정파 논리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중집보다는 그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관측됐다. 대의원 중에는 정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도 많은 데다 다수의 대의원이 정파의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도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합의안이 부결된 것을 놓고 대체로 정파 논리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 노동계 안팎의 해석이다.

반대파는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합의안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그 명단을 공개하는 등 합의안 추인을 저지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민주노총이 지난 21일 개최한 노사정 합의안 찬반 토론회에도 반대파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노사정 합의안이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 이유를 정파 논리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반대 논리가 다수의 대의원에게 통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파는 민주노총이 요구해온 '해고 금지'가 노사정 합의안에서 빠진 점을 집중 공격했다. 해고 금지가 '고용 유지'라는 추상적 용어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휴업수당 감액에 관한 조항과 같이 경영계의 요구를 일부 반영한 부분에 대해서도 '독소 조항'이라며 날을 세웠다. 노동계가 기업의 노동시간 단축과 휴업 등에 협력하기로 한 조항과 관련, 사실상 구조조정의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찬성파는 노사정 합의안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인정하면서도 노사정 3자 구도의 현실적 제약 속에서 노동계가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의 내용을 담았다며 반박했다.

노사정 합의안의 이행과 후속 논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실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대책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노사정 합의안을 받아들이고 후속 논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찬성파는 주장했다.

그렇지만 찬성파는 노사정 합의안의 문구 하나하나를 따지며 한계를 들춰내는 반대파의 논리를 결국 이기지 못했다.

이날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합의안이 부결된 것은 사실상 김 위원장에 대한 불신임의 성격을 갖는다.

김 위원장은 앞서 지난 10일 노사정 합의안이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될 경우 김경자 수석부위원장, 백석근 사무총장과 함께 즉각 사퇴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사퇴하면 민주노총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지도부 선거도 조만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사회적 대화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고 직선으로 당선된 김 위원장은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에 실패한 데 이어 노사정 합의안 추인도 못 얻고 물러나게 됐다.

김 위원장은 24일 오후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거취를 포함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민주노총이 끝내 노사정 합의안을 거부한 것은 사회적 대화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인 19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참여했다가 내부 반발로 지도부가 사퇴하는 등 내홍을 겪은 민주노총에는 노사정 대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2005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 참여 안건을 부친 대의원대회에서는 반대파가 소화기와 시너를 뿌리는 난동을 벌이기도 했다.

2017년 말 사회적 대화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고 직선으로 당선된 김 위원장은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를 추진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번번이 무산됐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등을 돌린 데는 현 정부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 '노동존중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포함한 진보적인 노동 정책을 추진했지만, 반대 여론에 밀려 상당 부분 후퇴했다.

최저임금 인상 정책만 해도 집권 초기에는 두 자릿수 인상률을 이어가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급브레이크'를 밟아 올해 인상률을 2.9%로 떨어뜨린 데 이어 내년도 인상률은 역대 최저인 1.5%로 낮췄다.

정부가 공약과는 달리 '우클릭' 행보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경우 반 노동 정책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민주노총 내부에 확산했다.

노사정 합의안을 최종적으로 거부한 민주노총은 상당 기간 장외 투쟁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현 정부 임기 중에는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의 중심에 다시 진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노동계 안팎의 관측이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화를 제안한 당사자인 민주노총이 합의안을 걷어찬 결과가 돼 신뢰에도 큰 상처가 생겼다.

향후 민주노총이 대규모 투쟁을 조직해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민주노총이 지난해 수차례 벌인 총파업도 참여율이 1% 안팎에 머물러 '뻥파업'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에 직면했다. 민주노총이 이런 상황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노동자를 위해 대화도, 투쟁도 제대로 못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향후 투쟁 노선 설정을 놓고 민주노총 내부에서 내홍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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