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대청 기자
  • 입력 2020.09.02 15:23

[뉴스웍스=장대청 기자]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이라 불린다. 한국의 PC방 스타크래프트 친선대회에서 태동한 e스포츠는 이제 당당히 일반 스포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 e스포츠 종주국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종목은 단연 '리그 오브 레전드(롤)'다. 롤 챔피언스 코리아(LCK)를 주관하는 라이엇 게임즈에 따르면  지난 봄 LCK 스프링 대회는 하루 평균 463만명이 봤다. 압도적인 국내 PC방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롤의 인기가 그대로 옮겨온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롤 e스포츠를 주름잡는 슈퍼스타들 중에는 유독 한국인이 많다. 당장 리빙 레전드로 불리는 '페이커' 이상혁이 있다. 페이커는 라이엇이 주관한 모든 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다. 그는 세계 대회 '롤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와 LCK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선수이기도 하다. 30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페이커가 여태껏 상금으로 받은 액수만 해도 15억원 이상이다. 

다른 나라 무대에서도 활동한다. 지난해 롤드컵 우승을 차지한 펀플러스 피닉스는 중국 팀이다. 하지만 이 팀의 핵심 선수인 '도인비' 김태상은 한국인이다. '김군' 김한샘도 주전 선수로 뛰며 팀 우승에 이바지했다. 2018년 우승팀 IG에서도 '더샤이' 강승록, '루키' 송의진 등 한국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한국 롤 e스포츠지만 팬문화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LCK 댓글 팬문화 너무 싫다"

'짱자'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이 포털 네이버의 LCK 뉴스 기사 아래 남긴 댓글이다. 이 댓글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아 해당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 됐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금만 내려가보면 해당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을 두고 조롱하는 댓글이 가득했다.

누리꾼 '짱자'가 네이버 e스포츠 뉴스에 올린 베스트 댓글. (사진=네이버 뉴스 갈무리)
누리꾼 '짱자'가 네이버 e스포츠 뉴스에 올린 베스트 댓글. (사진=네이버 뉴스 갈무리)

비단 댓글뿐만이 아니다. LCK를 중계하는 네이버 스포츠, 유튜브, 아프리카TV, 트위치 등은 모두 실시간 채팅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여기 올라오는 채팅들은 차마 기사에 쓰기 힘들 만큼 비속어가 난무한다. 선수의 플레이 하나하나부터 외모나 행동들은 모두 악성 댓글의 희생양이 된다. 이용자들은 경기 관람에 집중하기보다 두 패로 나뉘어 선수를 비방하기 위해 몰두하는 듯하다. 특히 페이커가 출전하는 T1 경기는 더 난장판이다. 인기가 높은 만큼 샘을 내는 듯이 그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기 때문이다.

e스포츠는 팬과 선수의 거리가 가까운 스포츠다. 팬들도 게임 실력을 연마하면 프로 선수들과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다. 선수들이라고 연습 때까지 특화 서버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자주 프로 선수들과 게임을 하던 팬이 실력을 더 쌓으면 선수로 전향하기도 한다. 현재 프로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 가운데는 인터넷 방송을 하던 BJ, 스트리머 출신들도 있다. 팀 후원을 받아 일정 시간 개인 방송을 진행하는 선수들도 많다. 

그렇기에 게임 팬들이 무심코 남기는 조롱과 비난들은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선수들에게도 금방 가 닿는다. 지금은 일본 팀에서 활약 중인 전 T1 정글러 '블랭크' 강선구는 국내에서 활동했을 때 거센 비난에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은퇴 이후 개인방송을 하는 선수들이 악플러에 받았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e스포츠 선수들은 어리다. 현재 LCK 서머 결승전에 올라있는 DRX는 평균 연령이 21.2세다. '데프트' 김혁규를 제외하면 모든 선수가 2000년대 이후 태어났다. 지난 2013년, 데뷔 당시 페이커의 나이는 고작 18살이었다. 수많은 커리어를 쌓았지만 지금도 그는 25살이다. 프로게이머가 되지 않았다면 선수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고등학생, 대학생들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물론 팬과 가까운 환경이 악순환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자 불공정 계약을 공론화해 국회의원 개입까지 끌어냈던 '그리핀 사태' 등 팬들이 e스포츠 생태계에 기여한 경우도 적지않다. 학교,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풀뿌리 e스포츠 대회는 한국이 e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던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입장료 티켓이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국내 e스포츠 산업이기에 인터넷 생중계 시청자 수와 커뮤니티 활성화 등 온라인 지표는 산업 흥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팬들은 자체 선수 양성소의 역할도 한다. 롤 리그와 e스포츠 시장을 주도하던 '오버워치'가 게임 점유율이 떨어지면서 선수 수급 문제가 불거진 것이 한 예다. 

팬과 인터넷, 두 가지 기반에서 탄생했다는 e스포츠의 특징 때문일까. 한국 인터넷 어디서나 악플이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지만 e스포츠는 그 정도가 심해 보인다. 악플러들은 "모두 리그 경쟁력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들러댄다. 과연 이게 맞는 말일까? 

DRX '쵸비' 정지훈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키보드로 욕하는 사람은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잘 버텨보겠다"며 "못한 사람에게 격려보다 몰아세우는 것이 기본이 된 흐름 속에서 내가 잘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가 이전 경기에서 꺼냈던 색다른 카드가 실패로 돌아간 뒤 한 얘기다. 선수를 향한 지나친 비난은 이들의 플레이를 위축 시킬 수도 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롤드컵을 모두 제패했던 LCK는 2018년부터 중국, 유럽 등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기업의 투자 규모, 정부의 산업 진흥책 등 여러 환경이 맞물린 결과겠지만 이런 비난 문화도 분명 영향이 있어 보인다. 성적이 좋은 리그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리그 성적 추락은 국내 e스포츠 시장 위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T1과 한화생명 등이 최근 공식 성명을 내며 "지속적인 악성 댓글에 대한 게임단 차원의 규제"를 하겠다고 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다. 지난 1일 페이커의 개인 방송에서는 한 악성 누리꾼이 그의 할머니를 언급하며 괴롭히는 사건도 일어났다. 건전한 비판이 아닌 비난과 조롱이 정말 선수들의 경기력을 비롯한 e스포츠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될지는 고민해볼 일이다. 

유명 선수의 자살 등 몇 가지 비극적인 사건 이후, 지난달 27일부터 네이버 스포츠뉴스 댓글이 닫혔다. 다음과 네이트에서도 스포츠 뉴스에 댓글을 달 수 없다. 포털 사이트의 연예 뉴스 댓글들도 이미 닫힌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정부, 인터넷 기업, 선플재단 등이 나서 꾸준히 선플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플랫폼들은 차단 말고는 악플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뉴스 댓글은 막혔지만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 선수 개인 SNS와 방송 등 악플러들이 접근할 공간은 무수히 많다. 결국, 악플러들 스스로 자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댓글을 달기 전에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본인이 정당한 비판을 통해 한국 e스포츠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샘이 나서, 혹은 누군가를 상처 주기 위한 나쁜 마음으로 비방과 비난을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악플러들은 "팬이 있어야 선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물론 반대도 똑같이 성립한다. 아니 더 중요할 수 있다. 바로 "선수가 있어야 팬도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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