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한익 기자
  • 입력 2020.10.11 07:55

'예비적 화폐 수요' 급증…미국, 글로벌 위기 때보다 화폐 발행 더 늘어

'5만원권 인출이 제한된다'는 공지가 붙어있는 자동화기기에서 이정훈 뉴스웍스 기자가 인출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이한익 기자)

[뉴스웍스=이한익 기자] 직장인 A씨는 조카 결혼식 축의금을 지급하려고 급히 시중은행 자동화기기(ATM)을 찾았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ATM에는 5만원 인출이 제한되니 자기앞수표나 만원권으로 출금하기 바란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A씨는 어쩔 수 없이 만원권 50장을 인출해 전달했다.

5만원권을 찾으려고 서울시내 시중 은행 ATM을 돌아보니 '제한된다'는 곳이 대부분이였다. 5만원권이 시중에 돌지 않는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은행이 5만원권을 덜 찍어낸 것은 아니다. 한은은 지난해보다 5만원권 제조 발주량을 3배 이상 크게 늘린 바 있고 지난 5월에는 이례적으로 2조원을 추가로 발행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 1~8월까지 총 16조5827억원 어치의 5만원권이 발행됐지만 시중에 유통된 후 환수된 금액은 4조9144억원에 그쳤다. 5만원권 환수율은 29.6%로 10장 중 7장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5만원권 환수율이 저조한 이유로는 코로나19 사태가 꼽히고 있다. 불안한 경제 상황에 대응함에 있어 경제주체들이 현금을 찾지 못하는 상황 등을 우려해 휴대성이 좋은 고액권을 비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 8개국에서도 코로나19 이후 화폐수요가 2~3배 가량 늘어났다.

한은이 9월 27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지난해 3~8월 5% 수준이던 화폐발행잔액 증가율은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해진 올해 동기 평균 13%로 증가했다. 이는 글로벌 위기(11%) 당시보다 높은 상승세다.

한은 발권국 화폐연구팀은 "화폐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은 불안한 경제 상황에 대응함에 있어 경제주체들이 안전자산과 안전결제수단으로 현금을 선호한데 따른 것으로 '예비적 화폐 수요'가 증가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비적 화폐 수요는 가치저장, 비축 등을 목적으로하는 고액권 위주의 수요다.

5만원권 '품귀'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와 관련해 한 금융권 전문가는 "부동산 매물부족 사태(패닉 바잉)와 유사하게 (고액권) 부족 사태에 대한 우려에 편승돼 속도가 가속되다"며 "시중금리가 낮아 은행권 예치에 실익기 없다고 판단해 사적인 수요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최근에 각 시·도에서 지역상품권을 발주하는 바람에 조폐공사의 제조순서가 늦어지는데다 한국은행이 연초에 정한 발권량을 임의로 늘리 수 없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세 당국의 징세 압박에서 오는 회피수단으로 고액권의 수요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개인용 금고가 홈쇼핑에서까지 많이 팔리는 것을 보면 (고액권) 수요가 대단히 높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는 부동산 음성 거래를 위한 5만원권 수요가 늘어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부동산 다운계약 등 음성적 거래가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5만원권의 낮은 환수율이 단순히 현금보유 성향의 증가 때문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김대지 국세청장은 국회 예사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액화폐 수요 증가 원인은 저금리 기조도 있지만 탈세의 목적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금융정보분석원의 여러 자료, 현금 영수증 등의 정보 수집을 강화해 현금 거래에 대해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답해 탈세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한편, 한 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지점에 5만원권을 1억5000만원 가량 보유하고 있지만 일반 고객이 아닌 기업, VIP 등 관리되는 고객에게만 지급하고 있다“며 ”다만 지점장 재량에 따라 일반 고객에게도 5만원권을 내주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 소재의 한 시중은행 자동화기기에 '5만원권 인출이 제한된다'는 공지가 붙어있다. (사진=이한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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