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진혁 기자
  • 입력 2020.10.25 11:41

신경영으로 ‘제2창업’ 주도…취임 당시 매출 9조9000억서 2014년 400조로 40배나 늘려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뉴스웍스=장진혁 기자]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그룹을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육성한 ‘위기의 승부사’라는 평가받고 있다. 이 회장은 특히 기업 창업 보다 어렵다는 수성에 성공하고, 이를 뛰어 넘어 ‘제2의 창업’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먼저 취임 이후 삼성그룹의 매출 증가액을 보면 놀랍다. 지난 1987년 12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타계 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당시 매출 9조9000억원이던 삼성그룹의 매출을 2014년 400조원으로 40배나 늘렸다.

이 같은 매출 증가는 이 회장의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도전적인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 취임사에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 "첨단 기술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의 활성화로 그룹의 국제화를 가속시킬 것이며,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키며 그들에게 최선의 인간관계와 최고의 능률이 보장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 같은 도전은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글로벌 무대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삼성전자가 휴대폰과 디지털TV,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은 이 과정에서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창조적 파괴‘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주문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1993년 신경영 선언으로 '제2창업' 주도

삼성의 ’거대한 전환‘을 이끈 것은 1993년 6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사내방송팀(SBC)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본 이 회장은 격노했다. 테이프에는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 내는 장면 등 불량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당장 서울로 전화를 걸어 사장들과 임원들을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켰다.

그는 임원들에게 ”불량은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부회장, 후계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며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 아직도 양을 외치고 있다“며 질타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지금까지 가장 유명하게 회자되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삼성은 물론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의 시발점이 되었다. 모든 것을 바꾸지 않는 한 삼성의 미래는 결코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2002년 사장단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양‘이 아닌 ’질‘로 승부…신경영의 핵심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양 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신경영으로의 전환을 위해 솔선수범했다. 수백명의 중역들을 미국, 일본, 유럽 등지로 데리고 다니며 삼성의 현주소를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변화에 대한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체감하도록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전격 도입했다. 오후 4~5시에 일과를 끝내고 남는 시간에 운동이나 어학공부 등 자기계발을 하도록 유도했다. 종업원 삶의 질을 높여야 제품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또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1995년에는 500억원어치에 해당하는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우는 ’휴대폰 화형식‘을 지시하기도 했다. 양보다 질 경영을 우선시 하는 이 회장의 이 같은 행동은 삼성 임직원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삼성 임직원들에게 ‘품질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시대 앞선 통찰력…디자인·창조경영 선도

이 회장의 신경영은 질적인 변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왔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왜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고 파나소닉은 멀리서 봐도 파나소닉인데 삼성 제품은 아직도 이름을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가”라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5년 밀라노 전략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이어 1995년 그룹 내 디자인 학교인 ’SADI‘를 설립한 데 이어 2005년 4월 주요 계열사 사장들을 이탈리아 밀라노로 불러모아 디자인 전략회의를 여는 등 초일류 기업을 향한 디자인 경영을 독려했다.

이 회장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이며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한다”며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다른 기업들이 2000년대 중후반이 돼서야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디자인 분야에 투자를 강화한 것에 비춰볼 때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2006년 두바이 창조경영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2006년 두바이 창조경영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마하·창조 경영 도입해 초일류기업 도약 발판

이 회장의 신경영과 디자인경영은 ’창조 경영‘과 ’마하 경영‘로 이어졌다.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식변화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회장은 2006년 사장단 회의에서 창조경영과 마하경영을 화두로 꺼냈다. 제트기가 음속(1마하=초속 340m)을 돌파하려면 설계도는 물론 엔진·소재·부품을 모두 바꿔야 하는 것처럼 삼성도 선진 기업을 추월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회장의 이 같은 주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되어야 할 숙제로 남겨진 상태다. 삼성이 이 회장 별세 이후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지속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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