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12 10:57
6.25전쟁 때 북한군 남침을 피해 급히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 행렬이다. 납세의 의무를 피하려 줄행랑을 치는 사람들에게 이런 '피난민'의 인상을 심어주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조세(租稅)를 피하는 일은 어떻게 불러야 옳을까. 우회해서 조세 부담을 피해가는 행위는 회피(回避)다. 앞에 막아선 무엇인가를 슬쩍 비켜가는 일이다. 적어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해서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부담 등을 우회하는 행위다.

아예 도망을 치는 일도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도피(逃避)라고 해야 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피하기 위해 현장에서 멀리 줄행랑을 치는 행위다. 회피가 나름대로의 우회를 위해 잔꾀를 내는 일이라면, 도피는 아예 ‘나 몰라’식의 뻔뻔한 동작이다.

국민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라고 규정하는 일이 있다. 바로 조세 납부의 의무다. 국가와 사회의 운영을 위해 개인이 제 소득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는 일이다. 이런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별별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세금 피하는 행위를 한자 낱말로 적으려면 위의 회피나 도피가 맞다. 그런데도 가끔 이를 피난(避難)으로 적는 사람이 있다. 피난의 둘째 글자 난(難)은 우선 어려움을 뜻한다. 그러나 ‘피난’이라는 단어에서 이 둘째 글자 ‘난’의 정확한 새김은 ‘재난’이다.

먼저 가뭄, 홍수, 흉년 등 천연의 재해인 천재(天災)를 일컫고 전쟁 등 사람의 요소가 일으킨 인재(人災)도 그에 해당한다. 따라서 ‘피난’은 사람이 감내하기 힘든 재난에 직면해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주지 등을 어디론가 옮기는 일이다.

그런 맥락을 감안하면 제법 돈을 벌었으나 납세의 의무를 피하고자 유령회사 등을 차려놓은 뒤 세금 탈루 등을 노리는 사람에게 피난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의미의 적절성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아울러 국민으로서의 납세 의무를 ‘재난’으로 규정함으로써 행위자에게 상당한 정당성을 주는 셈이다.

요즘 파나마 등 지역의 조세 회피처에 몰려들었던 각국 사람들로 언론이 소란하다. 한국의 유력자, 세계 각국의 유명 정치인과 기업인의 이름이 줄줄 새나왔다. 조세를 회피, 또는 도피하기 위해 유령 회사가 세워지는 곳의 영어 표현은 ‘tax haven’이다.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아예 내지 않아 천국에 다름없다는 의미다.

사정이 그러하니, 세금 내지 않기 위해 그곳으로 줄행랑치는 사람을 조세 회피자, 조세 도피자라고 불려야 한다. 이들에게 조세 피난민이라는 이름을 주는 일은 정말 가당치 않다. 그럼에도 한 유력지는 4월 12일자 지면에서 거듭 이곳을 ‘조세 피난처’로 표기하고 있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언어의 숨은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남용을 하다가는 어느덧 세금을 탈루하고서도 대로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불쌍한 피난민과 혼동하고 말 수 있다. 우리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닌 유력 언론이 이런 과오를 범한 뒤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지나가면 이는 정말 두려운 일 아닐까.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