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14 14:16
중국 장시(江西)의 최고 명산 여산(廬山)의 일출 모습이다. 이 산을 둘러봤던 북송 문호 소동파가 '진면목(眞面目)'이라는 단어를 써서 유명하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어가 '당국(當局)'이다. <사진=장시성 여유국 홈페이지>

어제 막을 내린 20대 총선을 돌아보며 떠올리는 한자 낱말이 하나 있다. 바로 당국(當局)이다. 우리의 쓰임새는 매우 잦다. 그러나 이 쓰임새 또한 달리 들춰볼 여지가 있다. 예전의 글을 다시 만져 소개한다.

송(宋)대의 문인이자 관리였던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현재 중국의 장시(江西) 지역 최고 명산인 여산(廬山)을 구경했을 때 시를 남긴다. “좌우로 둘러보니 등성이지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 봉우리다/멀고 가깝기, 높낮이 모두 다르구나/여산의 진면목을 왜 모르는가 싶었는데/이 몸이 그 산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세(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진면목(眞面目)’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다. 이 단어로 시는 더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철리(哲理)적 취향이 핵심이다. 눈으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 원근(遠近)과 고저(高低)가 서로 다른 산이 그려지고, 결국 이 산의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따랐다. 이어 ‘부분에 갇히면 전체를 볼 수 없다’는 각성이 따른다.

소동파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실 당국(當局)이라는 단어와 흐름이 같다. 당국은 요즘 한국말에서 어떤 일을 직접 처리하는 ‘관계 당국’의 의미로 쓰이지만 실제는 국면에 직접 몰두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장기와 바둑을 두는 상태다. 장기나 바둑알을 움직여 싸움을 벌이다 보면 흔히 전체 국면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깨너머 훈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당국’이라는 말에도 전거가 있다. 당(唐)대의 명신 위징(魏徵)은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건드리면서 번잡해진 유가의 경전 <예기(禮記)>를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태종 이세민의 대신 한 사람이 위징의 정리 작업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그 책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재상인 장열(張說)이 반대한다. 세세하게 달아 놓은 과거 학자들의 주석이 낫다는 게 장열의 판단이다.

학자 원담(元澹)이라는 사람이 재상 장열의 이런 행태를 두고 “한 국면에 빠진 사람은 미망에 빠지게 마련(當局者迷)”이라는 유명한 평어를 남겼다. 원담은 경전의 원래 뜻을 되살린 위징의 정리 작업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떤 현상이나 의식에 몰두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눈앞의 이익이나 편의성만을 좇을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원담의 평어 뒤에는 한 마디가 다시 붙는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정확하다(傍觀者淸)”는 말이다.

어느 상황, 또는 승부가 걸린 게임에 임했을 때 누구나 새겨들을 만한 충고다. 일을 벌일 때 옆 사람의 훈수만 기대하라는 말은 아니다. 일과 상황, 게임 등에 임하더라도 눈앞의 이해에만 몰두하지 말고 상황 등을 더 넓고, 깊고, 길게 바라보라는 뜻이다.

이번 총선에서 뜻밖의 참패에 직면한 집권 여당 새누리당의 상황이 꼭 그렇다. 더 큰 명분과 정책 개발, 인선(人選)에 나서지 않고 구태의연한 내분과 자기 사람 챙기기에 골몰하다가 맞은 참패다. 옆에서 나오는 훈수에도 아랑곳없이 집 안 싸움에 매달리다 불러들인 결과이니만큼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협량(狹量)과 좁은 안목으로는 대한민국을 이끌 수 없다. 유권자는 옆에서 나오는 경고음과 훈수를 무시하며 치졸한 싸움으로 일관한 새누리당을 표로써 심판했던 셈이다. 정말 달라지지 않으면 미래가 없는 게 한국 여당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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