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15 16:12
소설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이 남쪽 '오랑캐' 장수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차례 풀어준 이야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성어 내용을 그린 중국 그림이다.

궁지에 몰리는 상대를 처리하는 방법은 어쩌면 한 집단이 지닌 문화적 사유의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 마구 몰아치기가 있을 수 있다. 그악하게 상대를 다그쳐 재기가 불가능토록 하거나, 목숨조차 끊는 방식이다.

어중간한 판단으로 상대에게 반격을 허용하면 최악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완전히 상대를 꺾는 방법 말이다. 꺾는다는 말도 필요 없다. 마음으로 복속토록 만들면 최상이다. 그런 제안을 담은 성어가 칠종칠금(七縱七擒)이다.

이 성어의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실제 주역 제갈량(諸葛亮)이 남쪽의 오랑캐 장수 맹획(孟獲)을 일곱 차례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줘 마음으로 자신을 섬기도록 만들었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실재했던 사건인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동양의 유연한 사유는 살펴볼 만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고양이에게 덤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찍’ 소리라도 내고 죽는 게 낫다. 그러니 자신의 천적(天敵)인 고양이를 물려고 나선다.

이 말의 원전은 어딘지 분명치 않으나 한국과 일본에서의 쓰임이 우선 많다. 중국에서도 窮鼠嚙狸(궁서교리)라는 말이 오래 전에 나왔으나, 이 자체의 쓰임은 많지 않다. 대신 자주 쓰는 말이 狗急跳墻(구급도장)이다. 개(狗)가 급해지면(急) 담장(牆)을 뛰어 넘는다(跳)의 뜻이다.

중국에 이런 말 적지 않다. 일반인의 언어생활에 등장하는 빈도 또한 높다. 같은 뜻의 성어에 困獸猶鬪(곤수유투)라는 말도 있다. 곤경(困)에 빠진 맹수(獸)가 오히려(猶) 싸운다(鬪)는 구성이다. 역시 궁지에 몰린 쥐, 막다른 길에 몰린 개와 같은 처지다. 막바지에 들면 짐승이 사나워지는 법이라는 얘기다.

<좌전(左傳)>에 등장하는 그 용례를 보면 뜻이 대개 이렇다. “어려운 지경에 몰리면 짐승도 싸우려 드는데, 사람은 오죽하겠느냐?” 그렇다. 짐승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닥친다면 악을 쓰고 대들기 마련이다. 사람은 더 하다. 짐승이 지니지 못한 꾀까지 있으니 그 정도가 더 심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경우를 가리키는 성어가 바로 窮寇莫追(궁구막추)다. 궁지에 몰린(窮) 도둑(寇)은 쫓지(追) 말라(莫)는 얘기다. 이 말의 원전은 <손자(孫子)>다. 그는 이를 군대 운용의 큰 원칙으로 꼽기도 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전쟁터의 가르침이니 절실한 경험칙이라고 봐도 좋을 테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은 늘 절실하다. 함부로 조였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그런 경우를 알리는 말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다. 뒤(背)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물(水)을 두고 펼친 진영(陣)이다. 더 물러설 곳이 없으니 어떨까.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그러니 상대를 사지(死地)에 몰 경우에는 노련한 사고가 필요하다. 아예 그 목숨마저 끊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싸움의 방식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를 구체화한 성어가 欲擒故縱(욕금고종)이다. 상대를 잡고(擒) 싶으면(欲) 일부러(故) 풀어준다(縱) 식의 엮음이다.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이 사실 노렸던 점은 바로 이 상황이다.

이렇게 싸움은 높은 수준의 전략적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이번 4.13총선에서 드러난 새누리당의 싸움방식은 매우 치졸했다. 새누리가 참패한 원인은 여럿이지만, 공천을 둘러싼 친박과 비박의 집 안 싸움이 큰 몫을 했다는 점에는 많은 이가 동의한다.

공천의 이해를 두고 친박계가 비박계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장면이 매체를 타고 생중계로 전해지다시피 했던 점은 치명적이었다. 유승민의 공천 거부 과정, 그를 책임진 사람이 당 대표를 향해 날린 독설 등이 그 중의 ‘명장면’이다. 상대의 퇴로, 우회적인 압박을 통한 전체 흐름의 유지 등을 생각지 못한 단견과 전략부재는 새누리의 참패를 부르고도 남는 요소들이었다.

이 점에서는 여당이나 야당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한반도의 싸움 유형이 대개 단기적인 극점으로 쉽게 치닫다가 감정적 차원의 화풀이로 대국(大局)을 허물어뜨리는 패착(敗着)에 닿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4.13총선에서 드러난 새누리의 실책은 매우 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몰아치며, 상대에게 퇴로를 허용치 않는 용렬한 싸움의 방법이 모두 밖이 아닌 안을 향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국정을 이끌도록 집권당의 위상을 부여해줄 유권자가 있을까. 그 점에서 이 번 총선의 승부를 가른 국민의 선택은 현명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악한 말싸움에 치졸한 행태만을 거듭했던 새누리의 어리석음이 아주 크게 돋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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