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4.18 15:33
전후의 일본에서 소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빨간 머리 앤'의 일본판 애니메이션 포스터다. 1980년대 이 작품의 촬영지를 줄지어 방문했던 일본 여성들은 이후 한류 드라마 촬영지를 열성적으로 찾아다녔다.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 급속도록 확산한 한류 드라마에 대한 무한정한 사랑이 그냥 텔레비전 방송의 시청과 DVD 렌탈로 그쳤다면, 지금 우리는 한류에 대해서 이렇게 칼럼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 중장년 여성들은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젊었을 때 했던 것처럼, 가방을 싸서 한국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일본의 전후 여성들은 다른 아시아 여성들과는 달리 정말로 내일을 점치기 힘들었던 급변하는 세상을 살았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져 패전한 일본에 곧 바로 미군이 진주하자 일본의 장래는 암울 그 자체였다. 조금 과장된 면이 있지만, 미군정하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일본 여성은 두 부류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라이셔워 하버드 대학 교수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마츠카타 하루처럼 서양의 고위층 남자와 결혼한 운 좋은 일본여성들이 있었고, 소위 GI로 일컫는 미군병사들과 결혼해 뚜렷하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시험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치룬 일본은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서 둘째로 GDP(국민총생산)가 높았던 선진국으로 급상승하면서, 오히려 일본 남성들이 서양여자들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에 덩달아 더 많은 일본 여성들이 유학차 서양으로 진출했다. 일본 전후사상 최고의 흥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85년에는 일본의 개인 국민총소득이 전 세계 1위가 되면서, 하버드대학의 에즈라 보겔 교수는 <일본 넘버 원>이라는 책도 썼다. 1980년대의 버블시대에 일본 여성들은 틈만 나면 전 세계를 여행했는데, 특히 일본 소녀들 사이에서 전후 최고의 흥행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빨간 머리의 앤>의 촬영지로 유명했던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는 일본 여성 원정 방문객이 몰려들었다.

후기 식민지 멜랑콜리아

버블기의 젊은 일본 여성들이 서양문화에 심취하여, 삼삼오오 가방을 들고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방문했던 달콤한 기억은 갑작스레 찾아왔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1990년대의 장기 불황속에 잊히고 말았다. 1990년대를 힘들게 넘긴 버블기의 여성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자 ‘엔고(高)’라는 지속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도 비싼 엔을 들고 가까운 동양의 인국으로 여행가면 정말 싸게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2000년대 초기에 일본 여성들에게 각광을 받던 관광지가 전 세계 최고의 친일(親日) 국가라는 타이완, 그에 뒤지지 않는 싱가포르,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가장 친근하게 대하는 태국이었다. 그러나 타이완, 싱가포르, 태국은 이제 중년여성이 된 이들에게 열대의 이국적인 풍미는 던져 주었을지 모르나 젊은 시절 서양에서 느꼈던 스토리가 풍부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저 경치가 새로운 곳일 뿐이었지 어릴 적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본 의미 깊은 장소들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전 회에 이야기했듯 버블기를 경험하고, 1990년대의 몰락을 눈물로 지켜보고, 2000년대의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던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한국 드라마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한국 드라마에는 대만이나 중국계 영화 또는 드라마에 없던 일본과 유사한 요소에다가 전혀 새로운 로맨스를 담고 있었다. 거기에 단연 중국계나 태국계 배우에서 볼 수 없는 한국적인 뉴페이스가 가슴에 콱 박혔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소위 말하는 ‘후기 식민지적 멜랑콜리아’다.

일본이 패전하고 1965년 국교정상화까지 여러 종류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들락거렸다. 밀수를 위해 내한한 자들 중에는 주민의 신고로 구속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들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바로 남성적 후기 식민지 멜랑콜리아다. 즉, 패전으로 말미암아 포기하고 도망 나온 과거 식민지를 향한 향수와 한이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정권을 인수하자, 일본의 우익들은 설렜다. 혹시 박 장군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종필-오히라 각서로 시작된 한일 국교정상화는 급물살을 탔고, 그 대가로 한국은 포항제철과 서울지하철 1호선 등 여러 가지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의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전수받을 수 있었다. 대신에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소위 ‘기생관광’으로 만들어 입국하는 일본인 중년남성들을 위해 준비시켜 두고 있어야만 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인들을 접대하는 소위 ‘다찌’ 여성들은 미군을 상대하던 소위 ‘양공주’들보다 그 수적 성장세가 높았다. 즉, 기생관광은 바로 후기 식민지 멜랑콜리아로 한국행을 택하는 일본 남성 한류여행의 서곡이었다. 기생관광은 그러나 일본 현지 내에서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우선 기생들을 일본으로 끌어 들여 불법 체류시키며 화류계 장사를 하던 재일동포나 일본인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일본인 주부들이 한국 기생관광에 분노하며 대대적으로 반 기생관광 운동도 벌였다.

일본 도쿄대학교 히라타 유키에 교수는 한류 팬인 일본 여성들에게 한류에 심취하기 이전의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은 적이 있다. 한 응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이 회사여행으로 한국에서 기생파티 같은 것을 하고 왔어요. 그래서 한국 이미지는 아주 나빴지요. 아무것도 몰랐지만 좋은 이미지는 없었어요.”

 

서울로, 한국으로

후기식민지 멜랑콜리아는 이제 일본 중년 남성뿐만 아닌, 중년여성들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다. 일본 중년여성들은 복수라도 하듯 자신들의 남편들이 제일 싫어하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을 보러 짐을 꾸리고 삼삼오오 아니면 단체로 한국의 서울 등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서울의 거리나 춘천의 남이섬은 이 일본 아주머니들이 자국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본 <겨울연가>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고, 자신들이 20대 때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오열했던 <빨간 머리의 앤>과 흡사한 느낌을 주었다.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막 쏟아지는 여행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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