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영교 기자
  • 입력 2021.03.05 20:00

보수단체 반발…2007년 이후 8번이나 발의됐지만 번번이 철회·임기 만료로 폐기
트랜스젠더 군 복무, 영국·프랑스·독일·이스라엘 등 21개국서 허용…9000명 복무

2020년 1월 서울 군인권센터에서 변희수 전 하사가 강제 전역 조치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유튜브 'KBS News' 캡처)<br>
2020년 1월 서울 군인권센터에서 변희수 전 하사가 강제 전역 조치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유튜브 'KBS News' 캡처)

[뉴스웍스=조영교 기자]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임을 밝혔던 변희수 전 하사가 지난 3일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시신의 부패 정도가 꽤 이뤄진 점 등으로 보아 사망한 지 수일이 지난 것으로 추측됐다. 

육군 5기갑여단에서 전차 조종수로 복무하던 그는 성 정체성 문제로 갈등을 겪다 지난 2019년 11월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변 전 하사에게 육군은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린 뒤 강제 전역을 결정했다. 전역사유는 성전환 수술로 인한 '신체의 일부 상실'이다. 

변 전 하사는 전역 결정이 부당하다며 곧바로 육군본부에 인사소청을 제기했으나 군은 지난해 7월 강제전역 취소 요청을 기각했다. 이에 변 전 하사는 한 달이 지난 지난 8월 강제전역 처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변 전 하사에 대한 육군의 강제전역 조치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육군참모총장에게 전역 처분 취소를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위의 이같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이 흐른 지난 3일 변 전 하사는 다음달 예정됐던 행정소송 첫 변론일을 앞두고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향년 23세.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을까. '차별금지법'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지 않았을지 모른다. 해외 사례와 현재 진행중인 입법이 어디까지 왔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사진제공=언스플래쉬)
미국 포틀랜드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언스플래쉬)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보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다양한 성 소수자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해외에선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방식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는 전 세계 21개국으로 추릴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비롯한 유럽 15개국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이스라엘 등이 허용하고 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약 9000명의 트랜스젠더 군인이 활동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이스라엘, 볼리비아에선 트랜스젠더 군인이 공개적으로 복무할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1993년부터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했고, 여성화 얼굴성형을 포함한 모든 비용을 제공한다. 캐나다도 1998년부터 허용했으며 성전환 수술비용뿐 아니라 치료비도 지원한다.

영국은 복무 중인 군인이 성전환 수술을 할 경우 호르몬치료 비용을 지원하며 독일의 경우 트랜스젠더 군인 중 중령급 지휘관이 탄생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정부 때 성 전환자는 군 복무가 가능하지만 성 정체성을 밝히는 걸 금지하는 등 조건부로 허용해 왔다. 이후 오바마 정부 때 성전환 수술이 허용됐고, 호르몬 치료 비용까지 지원하기로 했으나 트럼프 행정부 때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가 제한됐다. 하지만 올해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는 등 정부의 기조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는 태국은 호르몬 치료나 가슴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로 한정하는 등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사진제공=장혜영 의원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사진제공=장혜영 의원실)

인권에 '나중'은 없다…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변희수 전 하사의 죽음으로 정치, 시민사회, 연예계 등 사회 곳곳에서 애도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왔다. 

트랜스젠더 연예인으로 잘 알려진 하리수는 4일 SNS를 통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변 전 하사를 추모했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변 전 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회에 대한 책임을 깊이 느낀다"고 자성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도 이날 변 전 하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정치권은 앞다투어 혐오 발언을 하기에 바빴다"며 "정부와 여당 역시 뒷짐지고 '나중에'라는 말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누구나 존엄하게 '오늘'을 살아야 함에도 그 삶을 뒤로 미뤘다"며 "그렇게 '나중에'는 절대 마주할 수 없는 시간과도 같았다"고 전했다.  

BBC와 가디언, SCMP 등 주요 외신은 4일 변 전 하사 사건을 보도하며 한국을 '차별금지법이 없는 국가'라고 꼬집었다.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차별금지법 입법 논의는 2007년 이후 8번이나 발의됐지만 번번이 철회되거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일부 종교단체 및 보수단체의 반발이 거세고 이들의 눈치를 보는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를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이 계류돼있다. 제정안은 성별, 장애, 나이, 출신국가, 종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을 이유로 한 모든 영역의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차별을 당했을 경우 국가인권위원회에 이를 진정할 수 있으며 인권위가 내린 시정명령을 이행되지 않을 경우엔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의원은 장 의원 외에 9명으로 공동발의 요건인 10명을 간신히 채웠다. 그럼에도 현재 해당 법안은 법안 소위에도 상정되지 못한 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있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름을 바꿔 일명 '평등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20여명의 공동발의자를 모으고도 당 안팎의 반발에 발의가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 전 하사가 싸워왔던 가치와 투쟁을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해선 안된다. 사회 구성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는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루빨리 관련 법 제도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변 전 하사의 죽음은 '생존'이 투쟁이자 저항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성 소수자의 현실에서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나중'은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더라면 변 전 하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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