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4.27 10:25
홍콩 느와르의 대표적 작품인 '영웅본색'의 한 장면. 유명 배우 저우룬파는 홍콩과 대만의 정상급 스타다. 홍콩과 대만의 장벽을 넘어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일이 한류 종사자들에게는 매우 큰 도전이었다.

이번 회부터 일본의 한류에서 잠시 벗어나, 중국의 한류를 살펴보자. 중국은 사실상 일본보다 먼저 한류가 번졌다. 당시 중국시장에 한국 대중문화를 수출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없이는 한류가 글로벌 대중문화로서 발돋움하기 힘들었으리라는 점은 명명백백하다. 일본이 현재 한류의 가장 큰 시장(투자액의 회수가 가장 용이한 곳)이라면, 중국은 한류의 미래시장이다.

 

한류의 걸림돌 강타이 문화

중국에서의 한류는 중화권 한류로 분류해서 이해해야 편하다. 즉, 중국이라는 국가영토는 지도상에 그려진 지역이지만, 중국문화권(문화지도)은 그 크기가 더 커진다. 우선, 중화문화권의 선두 주자인 두 지역은 홍콩과 대만이다. 그 다음에 싱가포르가 뒤에서 도사리고 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중문화는 홍콩과 대만 문화(강타이-港臺-문화라고 함)의 유입에 직면했다. 강타이 대중문화에는 홍콩의 영화를 주축으로, 중국 본토 출신 이연걸과 홍콩 출신 할리우드 배우 재키 첸 등 걸출한 인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등소평은 싫어도 등려군(등뤼쥔)은 좋아한다”는 중국 대중들의 말처럼, 대만이 낳은 불멸의 여성가수 테레사 텐도 있다. 강타이 문화에 영향을 받은 중국 본토의 신문화 운동 또한 거셌다. 아카데미 수상의 <홍등>과 베를린 국제영화제 수상의 <붉은 수수밭>을 감독한 장예모(장이머우)를 앞세운 5세대 감독들의 중국 영화가 그것이다.

또한, 재키 첸과 사라 첸이 같이 불러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명명백백 나의 마음>(明明白白我的心) 또한 중국 가요계의 변화를 잘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본토의 대중문화와 강타이 문화가 서로 유기적으로 묶이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강력한 대중문화산업이 강타이와 대륙을 잇는 중화권에서 존재하고 있는 한, 한류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어보였다. 홍콩과 대만은 또한 일본 대중문화와 이어져 있었다. 일본의 J-드라마와 J-pop은 홍콩과 대만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2012년 일본 아베 총리는 일본의 성장전략을 발표하면서, <Cool Japan>전략을 제시했다. 2012년도의 보정예산 170억 엔(한화 약 1,785억 원)을 더해, 2013년도예산으로 관민펀드 창설에 500억 엔(한화 약 5,25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2012년도 일본의 방송 수출액은 80억 엔(한화 약 840억 원)이었지만, 2018년에는 200억 엔(한화 약 2,100억 원)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 계획의 주된 표적시장은 바로 중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다.

 

이수만 회장의 5천만 먹여 살리기 전략

한류가 중국에 진출하는 것은 몽고군이 만리장성을 넘는 일 이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려는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과 궤를 같이 한다. 즉, 역사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없는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는 수구파들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쾌거라면, 한류의 중국 진출과 성공은 이수만 회장의 쾌거다. 이수만 회장은 늘 “중국이 우리 대중문화의 최대 시장”이라고 주장했고, “중국에 한류를 수출하면 5천만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어진다”라고 공언해온 인물이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지만, 중국의 대중문화 시장은 천당과 지옥이 상존하는 곳이다. 영화나 드라마나 음악 시장 자체가 거대 해적판 조직에 의해 항상 위협받고 있지만, 한 번 터지면 상상을 불허하는 공연수익을 거둘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곳이기도 하다.

해적판 시장을 비집고 직접 공연수익을 얻으려면, 가수의 콘서트밖에는 없다. 그러나 콘서트의 표를 팔려면 프로모션을 해야 하는 데, 홍콩과 대만, 나아가 일본이 버티고 있는 이 시장에서 K-pop의 프로모션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K-드라마로 홍보

기회는 다른 곳에서 왔다. 1994년 CCTV가 한·중 우호차원에서 우연히 <사랑이 뭐길래>를 수입하여 첫 방영을 하고, 3년 뒤인 1997년 재방송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욘사마의 <겨울연가>도 처음에는 위성방송에서 방송되었다가, NHK가 지상파방송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한류 열풍이 일본에서 불 지펴졌던 것과 똑 같은 패턴이었다. 1997년의 재방송으로 <사랑이 뭐길래>가 외국 드라마 사상 둘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1994년과 1997년의 불과 3년간 중국의 대중이 빨리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1994년에는 어린아이들이었던 1가구 1자녀세대 자녀들이 1997년에는 청소년, 청년층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드라마의 붐은 이어졌다. <가을동화>와 <순풍산부인과>, 그리고 <대장금>으로 이어져가면서, 한류라는 용어가 공식화하고, 부가적으로 한국 노래 즉 K-pop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갔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류의 열풍을 느끼는 청소년, 청년층의 중국인들은 곧 바로 ‘한성음악청’이라는 방송에 주목했다. 1997년부터 FM채널을 통해 주요 도시에서 방송된 ‘한성음악청’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수만 회장에게 절대적인 홍보매체가 되어 주었다.

1998년 클론의 노래 <쿵따라샤바라>를 필두로 Baby V.O.X., SES, 신화, 이정현, H.O.T., NRG 등 댄스음악이 중국의 젊은 층에게 강력하게 어필했다. 이들 중 배이비복스, SES, 신화, 그리고 H.O.T.가 이수만 회장의 멤버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콘서트 방식 선택

해적판의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 이수만 회장은 콘서트라는 방식으로 팬들에게 접근했다. 중국에서 K-pop 대성공의 서사시를 쓴 H.O.T.의 공연은 바로 해적판 업자들이 도사리고 있는 호랑이굴에 들어가 전멸하느니, 차라리 B2C(제작사가 구매자에게 직판하는 전략) 기업방식을 통해 팬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중국 대중문화 시장을 공략하는 정답이라는 점을 증명해준 셈이었다. 이 점이 바로 드라마는 해낼 수 없는 대목이고, 드라마보다는 K-pop의 상업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H.O.T.의 성공을 타고, 가수 겸 배우인 안재욱은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얼굴이 잘 알려진 점에 착안하여, SM과 같은 음악 기획사의 도움 없이도 중국에서 10회에 걸친 콘서트를 성공리에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류의 길을 열어준 한류로드의 개척자는 드라마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역으로 가수들이 드라마 배우로 활동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드라마와 K-pop의 상생관계는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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