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29 17:24
가을에 잎사귀를 떨군 은행나무의 모습이다. 은행(銀杏)과 살구나무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행(杏)이라는 한자는 공자(孔子)가 주도한 가르침과 배움의 장소에 등장해 매우 유명하다.

닥나무를 재배해 종이를 만들어냈던 지동(紙洞)과 은행나무 밑에 강단을 설치해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공자(孔子)의 행적에서 따온 행단(杏壇)마을의 각 앞 글자를 따서 지은 동네 이름이자, 역명이다.

지동은 실제 이곳에서 키운 닥나무를 재료로 종이를 만들어냈던 데서 나온 이름이고, 행단마을은 조선시대의 무신(武臣) 어유소(魚有沼)가 글공부를 했던 은행(銀杏)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종이를 가리키는 紙(지)라는 글자, 새삼 여기서 자세히 풀어갈 필요는 없다. 온갖 종류의 종이가 우리 생활 터전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몇 개의 성어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우선 백지흑자(白紙黑字)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쓰임이 많고, 한국에서는 간혹 일부 지식인들이 언급하는 성어다.

뜻은 간단하다. 흰 종이(白紙)와 검은색 글자(黑字)다. 종이에 먹으로 쓴 검은 글씨, 또는 먹으로 찍은 검은 글자를 가리킨다. 그런 원래의 지칭이 담는 궁극적인 뜻은 ‘확실한 증거(證據)’다. 하얀 바탕의 종이에 뚜렷하게 적힌 검은 글자,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근거를 가리키는 것이다.

낙양지가(洛陽紙價)는 아주 익숙한 성어다. 잘 팔리는 책, 그에 따라 오르는 종이 값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낙양지귀(洛陽紙貴)라고도 한다. 지상담병(紙上談兵)이라는 성어도 있다. 말 그대로 종이(紙) 위(上)에서 병법(兵)을 논한다(談)는 얘기다. 일반적으로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 장군 조괄(趙括)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진(秦)나라 명장 백기(白起)와 벌인 장평(長平)의 전투에서 병력 40만 명을 모두 잃는 치욕적인 패배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조괄이 어렸을 적부터 병서(兵書)를 탐독했고, 명장이었던 부친 조사(趙奢)의 영향을 받아 출중한 장수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 장평의 전투에서 병법에만 의존하는 고지식한 전술로 참패를 당한 점을 비꼬는 성어다. 병법의 내용은 원리나 원칙을 일컫는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교과서’다. 그런 정해진 룰에만 얽매이다 현실의 다양한 변수를 놓쳐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성어를 곰곰이 뜯어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조괄이 활동했던 중국 전국시대에는 아직 종이(紙)가 나오지 않은 때다. 그러니 이 성어의 출현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다. 찾아보니 청(淸)나라 이후에 출현한 성어란다. 아울러 조괄이 당시 싸움에서 병력 40만을 잃는 참패를 당한 점은 맞지만, 상대였던 진나라의 백기 또한 그에 맞먹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 성어는 원리와 원칙에만 매달리다 현장에서 출현하는 수많은 변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실제 전쟁에서 전투 교범에만 매달려 싸움을 벌이면 대개 커다란 패배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성어는 고마운 가르침을 주는 말에 해당한다. 단지 전국시대 조괄을 이 성어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며 그를 ‘천고의 어리석은 장수’라고 매도하지는 말자.

역명의 뒤 글자 杏(행)은 성균관대역에서 풀었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이라 해서 붙은 행단(杏壇)이라는 명칭은 유학의 깊은 물에 잠겼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아주 즐겨 썼던 단어다. 그러나 성균관대역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그 杏(행)이라는 나무가 은행(銀杏)인지, 아니면 살구나무인지 분명치는 않다. 여기서는 이 글자가 등장하는 운치 있는 시 한 수 소개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작품이다. 그는 비오는 청명일(淸明日)에 길을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정황이 제법 진지하다. 그러나 그가 결국 발길을 향한 곳은 술집인데, 그곳이 살구나무 있는 곳이란다.

 

청명 시절인데 웬 비가 부슬부슬? 淸明時節雨紛紛.

길 가는 행인들은 넋이 다 빠질 듯. 路上行人欲斷魂

물어 보자, 술집이 어디에 있느냐. 借問酒家何處有.

목동이 멀리 가리키는 살구꽃 동네. 牧童遙指杏花村.

-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을유문화사-

 

청명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 손질한다. 그런 날에 오는 비, 정신없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찾는 술집, 그리고 살구꽃 핀 동네. 그저 좋은 느낌을 주는 시다. 길과 사람이 빚는 정경(情景)이 그럴듯하다. 이 시로 인해 살구꽃 피는 동네, 행화촌(杏花村)은 지금까지 술집의 대명사로도 등장한다. 지행이라는 동네에는 그런 운치 있는 술집 없을까.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두리번거릴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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