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5.11 16:26
5월 14일은 석가모니 탄신일이다. 자비(慈悲)의 이타행(利他行)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남긴 인류 역사의 스승이다.

우리의 쓰임새에서는 매우 나쁘게 들리는 말이 비관(悲觀)이다. 어둡고 슬프게 바라보는 일, 전망이 매우 좋지 않아 생기는 나쁜 감정 상태 등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다.

이 세상에 빛을 던진 석가모니 부처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시각이 있다. 하나는 자관(慈觀), 다른 하나가 비관(悲觀)이다. 앞은 사바세계 뭇 삶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려는 시선이다. 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헤어날 수 없는 틀에 갇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중생들에게 던지는 슬픔의 눈길이다.

이 둘을 일컬어 자비(慈悲)라 하고, 때로는 자비관(慈悲觀)으로 적는다. 이 둘은 석가모니 부처가 남긴 가르침, 불교(佛敎)의 핵심적인 교리에 해당한다. 깊고 오묘한 불교의 가르침을 세세하게 다 적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비’에 담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남을 돕는 일, 즉 이타행(利他行)이다.

자애로움을 뜻하는 慈(자)에 슬픔을 가리키는 悲(비)가 붙어 있어 울림은 크다. 기쁨과 행복의 시선에 깊고 가득한 슬픔의 시선이 겹치면서 잔잔하지만 거센 변주(變奏)가 일어나 오래 되새기게끔 만드는 낱말이다. 앞은 Maitreye, 뒤는 Karuna라는 산스크리스트어를 번역한 글자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慈(자), 신음하면서 대상을 슬픔과 연민으로 지켜보는 마음을 담은 글자가 悲(비)다. 이런 사랑과 연민이 지닌 마음의 크기는 어떨까. 불교에서는 그를 무량심(無量心)으로 표현한다.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으며 깊은 마음이다.

이어 나오는 말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앞의 자비(慈悲)가 두 항목을 이룬 뒤 희사(喜捨)의 두 글자가 나머지를 채운다. 따라서 사무량심이라고 하면 자비희사(慈悲喜捨)다. 희(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중생을 보며 느끼는 기쁨, 사(捨)는 모든 집착과 편견을 버려 모든 이를 고루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불교의 오묘함에 깊이 들어가는 일은 그 어려움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자. 아무튼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으며 깊은 마음으로 나와 다른 모든 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기꺼이 도와 아주 너른 상태로 나아가라고 하는 가르침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요체다.

인류사회의 위대한 성인이 남긴 가르침이다. 좁은 안목과 감성으로 그런 가르침의 요체를 가르고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을 실행하는 일도 어렵다. 삶 속에 묻힌 작고 보잘 것 없는 인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관(悲觀)이라는 말에 괜히 눈길이 더 간다. 슬픔으로 세상을 보는 일 말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버둥거리면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던지는 공감(共感)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함께 느끼는 공감의 장이 서면 공명(共鳴)이 일어난다. 그를 서로 조금씩 더 키워갈 수만 있다면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도 한 결 더 수월해질 듯싶다.

곧 석가모니 부처의 탄일(誕日)이다. 제가 두르고 태어난 뒤 마주치는 좁고 촘촘하며 어두운 인연의 그물, 그로써 생기는 모든 편견과 집착을 버려 고르고 편평하며 드넓은 이타(利他)의 마당으로 조금씩 발을 옮겨 보면 어떨까. 우리사회가 시쳇말로 사용하는 ‘비관(悲觀)’의 어두운 색조 또한 엷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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