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5.14 09:00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다. 인도 북부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삶과 죽음에 얽힌 진리를 설파한 석가모니 부처의 탄일이다. 그의 가르침이 동북아로 전해지는 과정은 불교의 한역(漢譯)과정과 일치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쿠마라지바와 이후 중국,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해지는 불교의 확산 과정을 돌아본다. (편집자 주)

불교가 인도에서 동아시아 한자(漢字) 문명권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가장 눈부신 역할을 했던 쿠마라지바의 초상이다. 천재적인 언어 능력으로 그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한자로 번역하는 작업을 벌였다.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전통적인 중국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의 고향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아직 그리 가깝지 않은 이른바 ‘서역(西域)’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 문명의 여로(旅路)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 크다. 

그는 '중국인'이 아니다. 콧대가 아주 높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아울러 눈동자에 검정과 갈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을 지녔던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언어 재능을 보였던 비범한 인물이다. 그는 서역에서 이동해 지금 중국의 간쑤(甘肅)에서 17년 정도를 머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그 스스로도 비상한 어학적 재능을 발휘해 당시 중국에서 쓰이던 한문(漢文)을 익혔다.
그런 과정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탁월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언어 학습 능력이 문명의 두 갈래를 하나로 엮는 거대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불교는 쿠마라지바의 출현으로 인해 거대한 분기점(分岐點)에 선다. 그 전까지의 중국에 전해진 불교와 그로 인해 새로 전해진 불교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쿠마라지바 훨씬 이전에 불교는 중국 땅에 발을 디딘다. 적어도 동한(東漢 AD 22~250년)의 명제(明帝 28~75년) 시기에 불교의 그림자는 이미 중국의 중원 지역에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344년에 태어나 413년에 세상을 뜬 쿠마라지바의 활동 시기와 비교할 때는 적어도 300년 이상의 격차가 있다.
그 300여 년 동안 중국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불교가 아무런 발전의 흐름을 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역시 적지 않은 서역의 승려들이 중국 땅에 발을 디뎠으며,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불교의 가르침이 수많은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불교는 이른바 ‘격의(格義)’라고 하는 여과장치를 거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격의’라고 함은 무엇인가 자신이 지닌 어떤 형체나 개념에 견줘서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格(격)은 여기서 ‘비교’ ‘견주다’의 새김이고, 義(의)는 ‘개념’의 뜻이라고 보면 좋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불교는 중국인들이 스스로 생성해 낸 무엇인가를 꺼내 석가모니의 교의를 비교하면서 이해했던 형태다.
견주고 비교하는 대상은 불교, 자신의 ‘프리즘’에 해당하는 ‘格(격)’은 중국에서 발흥해 상당한 세력을 쌓았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중심의 도가(道家) 사상이었다. 이를 테면, 쿠마라지바 이전의 중국 불교는 노자와 장자의 시선으로 저 먼 서쪽의 석가모니 가르침을 살피고 이해했다는 얘기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폭도 그리 넓지 못했다. 우선 중원에서 낳고 자라왔던 도가 사상의 허실(虛實)과 유무(有無)라는 개념으로 부처가 가리킨 공(空)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중원의 허실과 유무는 부처의 가르침인 공의 개념에 비출 때 전혀 다른 갈래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마라지바 이전의 불교는 대개 그런 흐름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왔던 수많은 승려들 또한 언어적인 제약에 따라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적확하게 중국의 언어로 옮기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대개는 중국의 도가와 유가(儒家) 등 기성(旣成)의 사상적 유파가 펼친 개념에다가 불교의 교의를 ‘대충 비슷하게’ 얹는 형태였다는 얘기다.
특히 쿠마라지바가 중국에 발을 들이기 전 유행했던 현학(玄學)은 당시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의 토대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불교의 정확한 교의는 중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쿠마라지바의 출현은 획기적이었다고 한다. 그 앞의 시기와 그가 출현함으로써 생겨난 이후의 변화가 중국 인문학의 지형(地形)에서 마치 물이 크게 갈라지는 분수령(分水嶺))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의 초상. 중국 선종불교의 중흥조로 유명한 인물이다.

초기 불교가 중국에 발을 디디는 과정도 신비로움으로 일관했다. 대개 황제가 꿈속에서 “커다란 금인(金人)이 나타나 내게 무언가를 계시했다”는 식의 설화적인 전개였다. 그 금인(金人)이란 부처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불상(佛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그런 계시에 의해 중국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식의 설화가 대부분이다. 아련한 ‘메시지’만 있었던 셈이고, 그 안을 진짜 채울 내용은 빈약했다는 얘기다.
그 빈곳을 서역에서 중국으로 온 승려들이 조금씩 채워나갔지만, 역시 중국 후대 불교의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작업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인도의 북단에서 출발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몇 굵직한 흐름으로 갈라지는데, 쿠마라지바 이전에 중국에 다가선 불교는 그런 몇 가지 흐름이 죄다 섞여 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는 주지하다시피, 세계 불교 발전사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대승의 거대한 줄기로 자라난다. 그 기점(起點)을 쿠마라지바로 볼 수 있다는 게 지금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설(定說)이다. 실제 그는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 대승적인 요소를 뽑아내 큰 흐름으로 만들어낸 제자 용수(龍樹)의 교의 해석에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런 쿠마라지바는 간쑤에서 수많은 중국인 제자를 길러냈고, 마침내 생애를 마친 중국 장안(長安)에서는 제자 3000여 명을 이끌고 방대한 불경 번역 작업을 펼친다. 그로써 모두 74부 584권에 달하는 불경이 한역(漢譯)의 과정을 거쳐 중국인에게 전해진다. <마하반야(摩訶般若)> <유마힐경(維摩詰經)>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중국 종교사와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전들이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런 쿠마라지바의 노력에 따라 중국 대승불교는 드디어 ‘몸체’를 형성했다. 쿠마라지바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경전 번역과 해석 작업으로 인해 중국 대승불교의 큰 흐름인 이른바 ‘삼론종(三論宗)’이 만들어졌고, 이는 다시 천태종(天台宗)과 선종(禪宗) 등 중국 불교의 도저한 흐름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부처의 空(공)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의 대승중관(大乘中觀)의 체계는 그렇게 흐름을 형성했다. 
따라서 쿠마라지바와 중국의 대승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국에서 대승불교의 흐름을 열어간 주인공이 바로 쿠마라지바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은 앞에서 적었듯 천축국(天竺國), 또는 귀자(龜玆)라는 곳이다. 나중에 쿠차(庫車)라는 나라와 함께 현재 그 지명으로도 남아 있는 지금의 신장(新疆)이다.
전통적으로 중원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피부색과 눈동자, 생김새 모두 다른 이족(異族)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중국 문명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 간쑤는 그런 흐름이 가능했던 곳이다. 나 아닌 다른 이도 함께 어울려 내가 지닌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명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곳 말이다.
河西走廊(하서주랑)의 긴 복도는 따라서 옛 문명의 길이었다. 지금도 그곳이 예전처럼 찬연한 문명의 빛을 전하는 길인지는 더 봐야 하겠다. 그러나 그 문명의 길을 헤쳐 온 사람 중에 쿠마라지바가 남긴 빛이 찬연하기 그지없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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