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5.19 12:47
학교에 떠도는 넋, 귀신 이야기로 영화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여고괴담'의 포스터. 학교 귀신 이야기는 도심의 확장과 관련이 깊다고 보이는 소재다.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많이 사라졌다. 빨강 휴지, 파랑 휴지를 들고 화장실 위생 담당하던 학교 귀신 말이다. 종류도 많았다. 체육관 귀신, 음악실 귀신 그리고 밤이면 운동장에서 순라 돌던 이순신 동상 귀신까지 그렇다. 어릴 적 출몰하던 학교 귀신들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확장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서울 인구가 언제부터 1000만이었던가? 서울은 본래 큰 도시는 아니었다. 4대문 안에 10여만이 모여 살던 조선의 수도였다. 그러나 4대문 안 인구는 10만이지만 그 문에 들지 못하던 빈민들은 문밖에 마을을 이뤘다.

조선시대 빈민의 삶은 죽음에 가까웠다. 사망 원인으로 종기가 수위에 꼽히고 전염병과 유아사망도 빈번했다. 돈 없는 빈민은 가까운 야산에 멍석말이로 버려졌다. 이런 죽음이 모여 공동묘지 아닌 공동묘지를 이뤘다.

일제 강점기 경성(京城)이 도시화하며 공동묘지제도가 실시됐다. 우리 장묘제도는 절에 납골하는 일본이나 교회 마당이 묘지인 유럽과 다르다. 무덤은 가문에서 관리하기에 공동묘지는 낯설었다. 그럼에도 공동묘지는 곳곳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 달동네에도 관청이나 학교가 생긴다. 크지 않은 동회나 경찰서야 마을 중앙에 자리를 잡지만 학교는 다르다. 일단 큰 운동장이 필요하기에 마을 중앙보다는 외곽의 너른 터에 자리를 틀게 마련이다.

외곽의 너른 터란 대체로 주변 야산이다. 공동묘지는 재개발의 걸림돌이자 개발 후 가장 값 싼 땅이니 학교부지로 안성맞춤이었다. 많은 학교가 그렇게 현재 장소에 자리를 잡아 들어섰던 것이다.

야산에 잠들어 있던 무덤의 주인들이 문제였다. 한꺼번에 모아 집단으로 자리를 옮겼을 테다. 보잘 것 없지만 나름대로 오래 살았던 유택(幽宅)을 잃었으니 이 귀신들은 갈 곳을 잃었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귀신들도 새로 지은 학교에 ‘세’를 들어 살았을 테다. 월세건 전세건 들어가 살려면 세를 내야 한다. 하지만 이름도 없고 제사도 못 받는 귀신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화장실 위생 관리, 음악실과 과학실 기자재 관리, 밤이면 이순신 동상 타고 순라를 돌며 학교서 ‘알바’를 하게 된 것이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서울은 주검위에 새 집을 짓고 새 생명을 키워냈다. 이름 없는 무덤 위에 학교가 생겨 학생들은 뛰놀고, 갈 데 없는 슬픈 귀신들은 학교를 돌본다. 그렇게 죽음 위에 삶은 켜켜이 쌓여왔던 셈이다.

요즘 어린 학생들의 죽음과 자살 소식이 많이 들린다. 학생들 자살 예방 교육도 유행이다. 그런 장면을 지켜보면서 학교에 남아 있던 ‘알바’ 귀신들의 잔영을 떠올린다. 그러나 애꿎은 귀신들을 탓할 수 없다.

그보다는 견딜 수 없는 경쟁과 강박의 고단함이 어린 학생들을 너무 짓눌렀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횅한 공터에 지었던 학교, 그곳을 배회했던 가엾은 넋, 우리는 그 위에 다시 죽음을 쌓아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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